오마이뉴스
도서관 '사서'로 지내던 계훈모가, 갑작스레 전공도 아닌 '언론연표' 작업에 뛰어든 건 왜일까? 연세대학교 도서관학과 초빙교수였던 엘로드(J. McRee Elrod)의 요청이 계기였다. 엘로드는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연세대 도서관 부관장과 도서관학과 교수를 지냈다. '엘로드 저자기호법'으로 알려진, 저자명 문자식 기호법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엘로드다.
미국에서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은 엘로드는, 연세대가 한국 최초로 도서관학과(지금의 문헌정보학과)를 개설할 때, 교수로 학생을 가르쳤다. 당시 연세대 도서관학과에는 엘로드 외에도, 외국인 교수로 스와이거(Ethel Swiger), 버제스(Roberts S. Burgess), 크로슬린(Kenneth Croslin)이 있었다.
성실한 완벽주의자
ⓒ 계한경
미국으로 돌아간 엘로드는 1960년, 계훈모에게 "구한말에 발행된 영문 신문의 목록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외국인 연구자' 엘로드가 보기에도 계훈모는 믿음직한 '사서'였던 모양이다. 계훈모의 조사를 바탕으로 엘로드는, 1966년 12월 국회도서관을 통해 을 발간했다. 이 작업을 시작으로 계훈모는 방대한 '언론연표' 작업에 발을 디뎠다.
계훈모는 다른 사람이 관심을 두지 않던 언론 연표와 목록, 색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언론학자 정진석은 '성실한 완벽주의자' 계훈모를 이렇게 회고했다.
""미상(未詳)한 곳이 많이 있다"는 부분은 계훈모가 늘 하던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도 세밀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보탤 부분이 전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을 경우라도 그는 언제나 부족한 점이 많다거나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미심한 점이 있으면 자신이 근무했던 서울대학교 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종로도서관, 또는 신문사 조사부 같은 곳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 연세라면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정작 계훈모는 자신의 언론사 연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으로 보면 분명히 외도를 걸어 온 셈인데 이것이 한국 언론계에 조그마한 보탬이 될 수 있다니 조금도 후회됨이 없고 오직 흐뭇할 뿐이다."
천도교 출신 도서관 선구자
▲ 경성도서관 설립자 윤익선 일제강점기 사장, 만주 동흥학교 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다. 천도교도인 그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윤익선은 1920년 11월 취운정에 "경성도서관"(지금의 종로도서관)을 개관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투옥 당시 작성한 윤익선의 인물카드다.
ⓒ 국사편찬위원회
이런 업적으로 계훈모는 한국신문인편집협회가 발간한 (1988)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1983)에 등재되었다. 언론 분야 연구자로 인정받은 계훈모지만, 정작 자신이 18년 동안 일한 도서관 분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계훈모는 언론 분야 외에도 목록 정리 작업을 이어갔다. (신인간 통권 294-296호, 1972), (신인간 통권 306-309호, 1973), (1982)이 언론 외 분야에서 계훈모가 이룬 성과다.
300호 중에 보관본이 절반도 되지 않았던 영인본도 계훈모의 노력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1996년 4월 7일에는 영인본 발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LG상남언론재단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천도교 문헌을 정리한 것은, 그가 천도교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계훈모의 할아버지(계기간), 아버지(계연집), 어머니(방연화), 그의 아내(문용자)도 모두 천도교 교인이다. 계훈모는 1970년 천도교 서울교구로부터 '영암'(英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그는 1977년 서울교구 교화부장을 거쳐,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천도교 교훈을 지냈다.
한국 근대도서관의 탄생 과정에서 천도교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1920년 종로도서관의 전신인 '경성도서관'을 개관한 윤익선 역시 천도교 고위 간부였다. 경성도서관 개관 당시 초기 자금의 40%를 윤익선과 천도교가 부담했다. 경성도서관 개관은 사실상 윤익선 개인의 도서관 건립이 아니라, 1920년대 천도교가 펼친 교육.출판.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천도교가 배출한 '선구적 도서관인'을 꼽는다면, 해방 이전에는 윤익선을, 해방 이후에는 계훈모를 꼽을 수 있다.
그가 '오장육부를 빼놓고' 도서관에 드나든 이유
▲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계훈모 퇴임 후 계훈모는 등산에 취미를 붙이고, 전국의 명산을 찾곤 했다. 한국 100대 명산 중 78개 명산에 올랐고, 자신이 산행한 기록을 따로 남기기도 했다. 1981년 5월 29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계훈모는 자신의 일상도 꼼꼼히 기록했다. 이 사진 뒷면에는 지리산을 오른 일정, 날씨, 상황까지 상세하게 쓰여 있다.
ⓒ 계한경
언론연표와 문헌목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계훈모가 겪은 어려움도 많았다. 박종근의 글이다.
" 작성에 몰두하다 보니 주위에서는 미친 짓을 한다, 비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등등의 빈정거림도 많았고 또한 가정에도 소홀하게 되어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많으셨다고 한다."
정진석도 작업 과정에서 계훈모가 겪은 고초를 따로 남긴 바 있다.
"계훈모는 퇴직한 후에도 연론연표 작성을 위해 30여 년 동안 도서관에 수없이 드나들었다. 그럴 때면 그는 늘 부탁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하는 과정에 직원들의 불친절도 있었을 터이고, 자존심 상한 일도 많았다. 나는 그런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계훈모는 자신의 '간을 빼놓고' 도서관에 드나든다는 말을 내게 여러 차례 하셨다. 예전 직장의 후배와 아직 퇴직하지 않은 동료나 상사들을 찾아가서 자료 열람을 부탁하는 일이 내키지 않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던 사람이 이용하기에도, 도서관 문턱은 높았던 걸까? 어쩌면 계훈모가 연구를 위해 드나든 도서관의 사서들은, 그를 '이상한 자료를 찾는 귀찮은 이용자'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복사 한 장을 하기 위해 계훈모는 손주 뻘인 도서관 사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겸손한 그가 "오장육부를 다 떼어놓고 도서관을 다녔다"라고 말한 이면에는 이런 고초가 있었다. 이런 인내와 각고의 노력 속에 는 탄생했다.
서울대 도서관에 부고를 알리지 않은 사연
▲ 계훈모의 (英菴行積)은 계훈모의 행적을 모은 서류철이다. "영암"은 천도교로부터 받은 그의 도호다. 계훈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필 이력서부터 각종 증명서, 자신이 집필한 책의 언론 스크랩까지 두툼한 서류철을 만들어 남겼다. 계훈모가 남긴 이 서류철을, 계한경 선생을 비롯한 가족은 20년 가까이 소중히 간직해왔다. 이 서류철에는 정사서 자격증과 한국도서관학교 수료증을 비롯한, 한국 도서관사의 귀중한 서류가 포함되어 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그는, 먼 훗날 누군가 자신의 행적을 찾을 것을 알았던 걸까.
ⓒ 백창민
계훈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례 과정에서 폐가 되지 않도록 가족에게 당부하며, 사후 연락할 사람 명단까지 미리 정리해두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장례가 끝난 후에 알리도록 했다. 직장 동료와 도서관 후배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문한 '도서관 동료'는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언론 분야에서 선구적 연구자로 평가받았음에도, 정작 계훈모가 오래 일한 도서관 분야에서 그를 '도서관인'으로 조명하는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대학교 도우회에서 발간한 1999년 제2호에서 그를 조명한 글이 있을 뿐이다.
계훈모가 도서관에서 일한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18년 동안이다. 작성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꼼꼼함은, 도서관 근무 과정에도 드러났을 것이다. '언론사 연구자' 계훈모의 면모도 중요하지만, '도서관 사서'로서 계훈모의 행적이 묻힌 것은 아쉽다.
계훈모는 장지태, 백린, 류동렬, 계병진, 이상은과 함께, 서울대 중앙도서관 초창기 멤버로 일했다. 계훈모는 어떤 '사서'였을까? 앞서 1편에서 언급했던 서울대 도서관에서 35년 동안 근무한 박종근이 남긴 평이다.
"그저 묵묵히 스스로 일을 찾아 하시는, 그러면서도 황소처럼 지칠 줄 모르고 맡은 일에 충실하시며 조용하고도 소박한 전형적인 사서라고나 할까? 지나친 겸손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마치 도서관 봉사를 위해 태어나신 분처럼 천부적으로 사서 자질이 충만한 강직한 분이시다."
정진석은 '사서 계훈모'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무슨 일이건 부탁을 드리면 성심성의껏 도와주시는 분이다. 나는 계선생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면서 그 성실성과 섬세함을 새롭게 깨닫는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고는 나 자신 잊어버리고 만 일도 끝까지 기억하셨다가 알려주셨던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은 도서관 '사서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