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운동은 제도개혁의 역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옥죄던 영화법은 직접 부딪쳐야 했던 가장 큰 장벽이었다. 온갖 통제와 조건을 붙인 까다로운 영화법은 표현의 자유와 창작 욕구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저질화를 촉진한 핵심 원인이었다. 식상한 한국영화 대신 할리우드나 유럽의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했다. 영화에 빠져들었던 청년들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등을 오가며 새로운 영화를 통해 문화적 갈증을 달래야 했다.
한국영화의 출발은 공식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영화라기보다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일본영화의 한 부류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1926년 나운규의 이 민족영화를 상징하고 있었으나, 총칼로 억압하는 일제의 눈치를 보던 시기였기에 대부분이 친일 영화였다.
검열의 본격적인 시작은 활동사진(필름)이 등장하면서였다. 동아일보는 1922년 6월 25일 자 기사에서 '영화검열 개시'라는 제목으로 '경찰에서 검열을 실시한다'고 검열에 대해 처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2년 뒤인 1924년 2월 22일 자 기사에서 '소관 경찰서의 보안계 순사들이 현장에 가서 필름을 한 번씩 비춰본 후 직접 허가를 하였으나, (앞으로는) 보안과에서 검열을 맡는다'고 전했다. 4개월 뒤인 1924년 6월 30일 자 기사에는 '활동사진(필름) 검열을 경성(서울), 부산, 신의주로 통일한다'고 보도했다. 당시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들이 중국과 일본 등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로, 관문과도 같은 3곳이 외국영화 검열의 주요 장소가 된 것이다.
반도에서 첫 영화법은 1939년 4월 만들어진 조선영화령이었다. 일본의 영화법을 근거로 한 조선에서의 시행령이었다. 10월 1일부터 시행됐으나, 구체적인 취체(규칙이나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가 실시된 것은 1940년 1월 3일이었다.
핵심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검열과 규제였다. 26조로 구성된 일본의 영화법은 태평양 전쟁에 들어서며 국가 차원의 통제와 검열을 규정한 법이었다. 영화제작과 배급이 허용됐으나 감독과 배우는 등록을 해야 했고, 제작된 영화도 대본 단계에서 검열됐다. 이 법에 따라 일본에서도 일부 영화의 상영이 금지됐다.
주요 내용으로는 '영화제작업자는 주무대신이 지정하는 종류의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때에는 촬영개시 전에 주무대신에게 신고하고, 주무대신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영화배급업자에게 외국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종류 또는 수량의 제한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행정관청의 검열에 합격한 것이 아니면 수출하지 못하고, 주무대신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검열에 합격한 영화의 수출을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도록 했다. 행정관청의 검열에 합격한 것이 아니면 공중의 관람에 제공하기 위하여 상영하지 못한다'고 제한했다.
▲ 1935년 개관한 광주극장에 남아 있는 임검석. 당시 경찰이 영화를 검열하던 자리였다. ⓒ 김대현 제공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영화제작 또는 영화배급업을 한 자는 6월 이하의 징역 또는 20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으며, '임검을 거부·방해 또는 기피 또는 규정에 의한 보고를 하지 아니하거나 허위로 보고한 자는 500원에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영화의 모든 것을 간섭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의 시행령이었던 조선영화령 전문은 '영화의 제작·배급·상영 기타 영화에 관하여는 영화법 제19조의 규정을 제외하고 동법에 의한다. 다만, 동법 중 칙령은 조선총독부령으로, 주무대신은 조선총독으로 한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일본 영화법 제19조는 '이 법 시행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 주무대신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영화위원회를 설치하고, 영화위원회에 관한 규정은 칙령으로 정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선에서는 영화위원회 설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조선영화령은 6년 만인 1946년 10월 8일 폐기된다. 그리고 열흘 뒤인 10월 18일 이를 대체할 미군정법령 115호가 공포된다.
미군정법령 115호의 핵심은 검열이었다. '영화의 허가관청을 조선 정부 공보부로 정하고 영화 공연 전 그 적부를 검사하여 공보부 소정 표준에 해당한 영화를 허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불허가 영화의 금지에 대해서는 자연인, 법인을 막론하고 자신 또는 타인을 통하거나 규정에 따라 허가되지 않은 영화를 공연의 목적으로 배급 또는 공연함을 금했다. 이를 위반하여 배급 또는 영사한 영화는 몰수한다고 했다.
다만 미국군부 또는 그 대행기관이 상영하는 영화에는 적용치 아니함이라고 예외를 뒀다. 공연의 정의에 대해서는 '입장료의 유무와 관계없이 15인 이상 집회에 대하여 영화를 영사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어 '공보부는 영화의 전부를 허가 또는 불허가할 수 있으며 경우에 의하여 특수 부분을 삭제 또는 변경하여 허가할 수 있고, 본령의 규정을 위반한 자는 육군점령지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처단한다' 명시했다.
군정법령은 1948년 제헌의회를 통해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소멸된다. 이후 별도의 영화법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검열은 이어져 공보처 영화과가 담당하게 된다.
1948년 10월 10일 자 '동아일보'는 '영화 재검열'이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새로운 시정 방침에 의하여 영화가 가진 문화의 양양과 영화예술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사명을 완수하고자 다음과 같은 표준에 의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구 군정청 과도정부 공보부에서 검열을 받고 상영 중에 있는 영화를 재검열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전에 받은 검열증과 영화 프린트를 공보처 영화과로 제출해 새로 검열을 받아야 하며, 2월 20일 이후의 재검열에 있어 합격한 영화는 상영허가증만을 교환 발부하고 만일 소정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화상영공개권을 실권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 1963년 일간지에 실린 재상영을 알리는 광고 ⓒ 대한영화사
한국전쟁 휴전 이후인 1955년 검열 업무는 대통령령에 따라 문교부가 관장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1960년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 이후에는 검열이 폐지되고 민간 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영륜)가 만들어진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던 검열이 멈춘 것이다.
1960년 8월 10일 자 동아일보는 '관영 검열제 폐지에 따른 민간인들에 의한 자율적인 영화윤리운영을 목적하고 준비 중이던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8월 5일 창립했다'며 '영화가 국민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중시하여 영화의 윤리성을 자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산영화와 수입 외국영화를 심의하고 영화창작 표현의 자유와 예술성을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영화윤리를 건강하게 육성하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1961년 한국영화가 첫 번째 중흥기를 맞았던 데는 검열폐지 영향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대진 감독의 가 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고, 유현목 감독의 과 같은 내용의 영화로 흥행 대결을 펼친 홍성기 감독의 과 신상옥 감독의 이 화제를 모았다. 1960년 11월에는 김기영 감독의 가 개봉했다.
하지만 검열폐지는 한순간일 뿐이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이를 다시 되돌려 놓는다. 의 경우 1961년 7월 19일 재검열을 통해 상영이 중단되는데, 관계기관의 고발에 따른 조치였다. 1963년이 돼서야 겨우 상영을 재개할 수 있게 된다.
영화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5.16 군사쿠데타 다음 해인 1962년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통치기구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당시 공보부 산하에 국립영화제작소를 만든 데 이어 1962년 1월 20일 처음으로 영화법을 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군소 제작사들이 난립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촬영 장비와 시설을 갖춘 업자들만 제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제작자와 배우의 등록을 규정한 것은 일제강점기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일본의 영화법을 본뜬 것이었다.
영화제작업자는 촬영기 1대 이상, 조명등 5kw 이상, 5년 이상 경험 제작기술자 1인, 기성배우 2인의 전속 고용계약서, 5천만 환 이상의 자본금을 적립하는 등의 조건을 갖추어 공보부에 등록하고 등록증을 받도록 규정했다.
영화법 제정으로 인해 64개였던 영화사는 17개사로 통합됐다. 배우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최은희, 도금봉, 남궁원 등이 전속 배우가 됐고, 한양학원 김연준이 설립한 한양영화사에는 김지미와 최무룡 등이 전속 배우로 등록한다.
검열도 되살아났다. 당시 상영허가를 않거나 장면을 삭제할 수 있는 검열기준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위신을 손상하였다고 인정되는 때 ▲국기 또는 국가를 경공하게(공손히 받들어 모시게) 취급하지 아니하였다고 인정되는 때 ▲자유우방의 관습 또는 민족 감정을 존중하지 아니하여 국제간의 우의를 훼손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때 ▲미신을 존중하였다고 인정되는 때 ▲복수를 정당하게 취급했다고 인정하는 때 등 15개 조항에 달했다.
영화법 시행 이후 1년 뒤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국영화산업 육성과 영화수입 억제를 위한다는 방편으로 당근책을 제시하면서 1963년 영화법을 개정한다. 국내 제작사의 제작실적과 수출실적에 따라 외화 수입쿼터를 배정하고, 외화의 국내상영수익은 제작에 투자해 우리 영화의 질과 양을 향상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작자는 3~5편 제작에 영화 1편, 수출업자는 1편 수출에 1편을 수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 서울 답십리에 있던 새한필름촬영소 모습 ⓒ 국가기록원(문화체육부)
하지만 법 개정의 핵심적 이유 중 하나는 제작 조건의 강화였다. 촬영 스튜디오와 현상소를 갖춰야 하고 연간 15편 이상의 극영화제작실적도 첨가하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규정된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게 한 것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개정된 영화법 시행령에서 정한 기준은 만만치 않았다. ▲35mm이상의 촬영기 3대 이상 ▲조명기(200kw 이상) ▲내화구조로서 방음장치가 완비된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스튜디오 ▲동시 녹음기 1대 이상 ▲5년 이상의 영화감독경험을 가진 전속영화감독 3인 이상 ▲5편이상 극영화에 출연한 경험을 가진 남녀 전속 배우 각10인 이상 ▲5년 이상 영화촬영경험을 가진 전속촬영기술자 3인 이상 ▲5년 이상의 녹음 경험을 가진 전속녹음기술자 1인 이상 등이었다.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영화사가 많지 않았다. 소수 제작사만 배려한 것이었다. 기존 제작업자들 외에 새로 영화사를 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군소 제작자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논란이 크게 일자 일부 조건이 완화된다. 조명기 200kw 이상은 조명기 50kw 이상으로, 동시녹음기 1대 이상, 녹음기 1대 이상으로 변경됐다. 내화구조로서 방음장치가 완비된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스튜디오 조건은 삭제됐다.
제작사를 줄여라
그렇지만 완화된 조건은 3년 뒤 두 번째 개정에서 원상회복된다. 1966년 1월 당시 공보부는 연간 제작 편수를 120편으로 제한하고 우수 국산영화에 보상하는 영화시책을 발표한다. 군소업체들이 연합해 영화사 등록을 하면서 1965년 한국영화 제작 편수가 189편에 이를 정도로 양산된 것을 원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영화시책은 매년 발표하는 영화정책의 운용 방안이었나, 이때는 영화법 개정의 전조였다.
1966년 7월 15일 전면 개정된 영화법은 제작 편수를 줄이기 위해 제작사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존 영화법 시행규칙에 상영허가 기준으로 명시했던 검열 조항은, 개정 영화법에서는 '검열기준'으로 본문에 자리를 잡는다.
또한, 국산영화 장려 방안으로 외화만 상영하던 개봉관도 일정량의 국산영화를 상영토록 하고 국산영화가 합작영화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편수는 그해 상영된 국산영화의 3분의 1을 넘지 않도록 규제했다. 스크린쿼터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영화만 상영하던 극장은 국도극장, 명보극장, 아카데미 극장, 국제극장, 아세아극장 등이었고, 외국영화만 상영하던 곳은 스카라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 등이었다.
구체적인 시행령은 12월에 확정된다. 촬영 스튜디오는 300평을 갖춰야 했고, 50kw조명기 3대가 있어야 했다. 당시 흑백영화 1편을 촬영하는데 필요한 조명은 50kw 조명기 1대면 충분했다고 한다. 과도한 시설을 요구한 것이다. 국산영화가 수출될 때는 외화를 변작 또는 모방한 부분이 없는 것에 한하도록 했고, 외화 수입은 국제영화제 출품 한국영화 편수, 국제영화제 수상 상장 개수, 공보장관으로부터 수상한 영화 편수에 따라 수입권을 1대1로 정했다.
이듬해인 1967년 3월, 이 기준에 따라 26개 제작사 가운데 13개사에 대한 등록요건 완비를 인정한다. 이후 추가로 요건을 완비한 제작사 12개가 추가돼 포함해 모두 25개사가 등록한다.
하지만 제작사를 줄이려는 의도로 법을 개정한 것이었기에 25개 제작사도 많은 편이었다. 이때 제작업자들 간 협회 구성을 통한 다툼이 생기면서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주류 11개사 중심으로 한국영화업자협회(회장 주동진)가 구성된 것에 대해 나머지 14개사가 따로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로 나눠 대립한 것이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불시에 시설 점검을 통해 2개사의 등록을 취소하더니, 9월에는 제작사를 아예 절반으로 줄인다. 영화법 개정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25개사 난립한 것은 영화법 정비에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현상이라며 영화사들의 통합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때 통폐합으로 남은 12개 영화사는 대양영화, 세기상사, 신필름, 안양필름, 연합영화, 연방영화, 제일영화, 태창흥업, 한국영화, 한국예술, 한영영화, 합동영화사 등이었다.
이 당시 영화법의 문제는 제작을 12개사가 독점한 것이었다. 당시 제작사들은 연간 제작 편수가 150편을 초과할 수 없다는 이른바 제작쿼터제를 결정한다. 내부 카르텔이었다. 수입쿼터, 스크린쿼터에 이어 제작쿼터까지 등장하면서 영화인들 간에 서로 대립도 심해진다.
1966년 영화법 개정 이전만 해도 마음대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작은 규모 영화사의 프로듀서들은 12개 제작회사로부터 쿼터를 100만 원~150만 원에 사서 제작해야 했다. 개별 제작사가 1년에 12편을 만들어야 했으나 70%밖에 소화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제작자들은 나머지 제작쿼터를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굳이 영화를 안 만들어도 수익이 되는 것이었다.
▲ 1968년 개봉한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이 같은 문제점에 불을 지른 것은 1968년 7월 개봉한 이었다. 정소영 감독 연출에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배우가 출연했는데, 당시 국도극장에서 30만 관객이 들며 크게 흥행한 것이다. 당시 흥행 기준은 서울 관객 2~3만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수준이었고, 10만 이상이면 대박으로 평가됐다. 제작은 대양영화사가 했으나 실제로는 TV 프로듀서 출신이었던 군소 제작사 피디 정소영(감독)이 기획과 연출을 담당한 영화였다. 의 흥행은 능력은 있으나 직접 제작을 할 수 없어 분통한 마음이던 영화인들을 자극한다.
영화제작 독점에 대한 반발이 일면서 1968년 8월 31일 당시 영화인협회(회장 김승호)가 주최한 한국영화 50년 사상 최초의 영화인 궐기대회가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다. 당시 영화인협회 감독·시나리오·기술·연기·기획·음악 등 분과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해 '영화법이 제작업자등록의 시설기준을 강화하는 동시에 제작쿼터제를 실시케 함으로써 영화제작권을 10여 명의 업자에게 독점체제를 확립했다'고 비판한다.
영화인 궐기대회는 배우 신성일, 윤정희, 김지미, 남정임, 김진규, 신영균, 황정순, 복혜숙, 장동휘, 구봉서, 허장강, 서영춘, 문희, 감독 유현목, 최무룡, 이만희, 정진우, 박상호, 강범구, 임권택, 강대진 등 영화인 1천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였다.
신상옥·우기동·주동진·서종호·성동호·한갑진·곽정환을 대표단으로 한 한국영화업자협회와 유현목·김강윤·최수용·이강천·이봉래·정진우가 대표단으로 나선 영화인협회는 협상을 통해 제작쿼터 폐지에 합의한다.
당시 영화인협회 협상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정진우 감독은 "내가 영화인 궐기대회 비용을 냈고 영화인협회 회장을 맡은 김승호(배우)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정 감독은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 독점 등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때 영화계의 가장 실력자가 신상옥 감독이었고, 곽정환(합동영화 대표)도 실세 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제작사가 많은 것보다는 적어야 영화사를 운영하기 편하니까 시설 강화를 통해 제작사를 줄이려 한 것이다. 제작 쿼터까지 만들어서 이익을 챙기니 영화인궐기대회가 열린 것이었고, 신상옥 감독 화형식까지 했다. 두 분 다 한국영화 발전에 공이 지대한 사람들이지만 당시에는 영화계에서 그렇게 대립하기도 했던 관계였다."
정진우 감독은 또한 "영화법 개정에 역할을 한 정치인은 민주공화당 강상욱 국회의원이었다"며 "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홍종철 문공부 장관도 같은 육사 출신이다 보니 영화법 개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강상욱은 육사 9기로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맡았고 청와대 대변인을 거친 쿠데타 세력의 일원으로 1963년 국회의원이 됐다.
스크린쿼터 강화
논란이 일면서 영화사업의 부실과 혼란을 타개하고 시정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영화법은 1970년 다시 개정된다. 영화제작자는 제작에 있어 전속된 자에게 제작을 위탁할 수 있게 했다. 영화진흥조합은 제작자 실적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게 했다. 개정 때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던 외화 수입은 우수영화 국제영화제 출품 수상 등에 의한 외화 쿼터 보상제도를 지양하는 대신 외화 수입추천을 새로 설치되는 영화진흥조합 제청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하도록 했다. 외화 수입을 위해서는 조합에 국산영화진흥기금을 내야 하는 조건을 강제규정으로 만들었다.
▲ 1972년 영화 촬영장에서의 신상옥 감독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영화의 실세였던 신상옥 감독은 개정 영화법이 1970년 7월 16일 국회를 통과한 이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개정 영화법은 나의 지론이고 독립피디 참여 또한 피디 제작 양성화라 환영한다"며, "한국영화 가장 큰 원인은 생산 과잉. 영화가 귀하면 양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또 "제작자들이 TV 프로듀서들만큼 관객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70년 당시 영화사는 모두 22개였다. 1966년 영화법 개정 이후 12개로 재정비됐다가 다시 늘어난 것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문제는 제작사들이 지방흥행사들의 선금을 밑천으로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돈을 댄 쪽에서 배우 캐스팅은 물론 작품 내용에까지 간섭해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1968년 제작 쿼터가 사라지면서 영화가 양산됐고, 상영할 극장이 부족해졌다. 지금처럼 복합상영관이 있던 시절이 아니기에 한 편의 영화는 하나의 극장에서만 개봉할 수 있었다. 제작사들은 평상시는 50만 원, 명절 대목에는 100만 원 웃돈을 줘야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시킬 수 있었다. 당시 한국영화 1편의 제작비는 1천만 원~1200만 원 정도였다.
1970년 개정 영화법은 이런 문제에 대한 영화계의 여론이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많은 영화사가 도산하던 가운데, 한국영화의 살길을 찾도록 한다는 것이 법 개정의 방향이었다. 그렇다고 영화계 전반의 요구가 크게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크린쿼터는 한층 강화된다. 문공부 장관이 조합 의견을 들어 연간 제작 및 상영 편수를 조절하게 했다. 외화 수입 편수는 한국영화 상영 편수의 3분의 1을 초과할 수 없고, 방화 보호와 육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3분의 1의 10% 범위 안에서 외화 수입 편수 추가할 수 있게 했다. 국산영화 상영의무를 신설해 국산영화 상영 안 하거나 영화업자로 등록 안 한 사람이 영화제작을 했을 경우 50만 원 이하의 벌금과 과태료를 물게 벌칙도 강화했다.
시행령을 통해 외화수입추천자격을 영화수출업자에게도 부여키로 하면서 1971년에는 세기상사(우기동 대표), 합동영화(곽정환 대표), 안양필름 (신상옥 대표), 동아수출공사(이우석 대표), 우성영화사(김용덕 대표), 화천공사(박연목 대표) 등 12개 제작사가 수입자격까지 얻게 된다. 외화가 돈이 되던 시기, 제작과 수입을 병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70년 개정 영화법의 문제는 한국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한국영화가 외화 수입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면서 날림으로 제작되거나 대충 만들다 보니 흥행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한국영화 제작은 오직 외화 수입쿼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 또한 심해져 간다. 1971년 4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3선 연임에 성공한 이후인 12월, 박정희 독재정권은 안보와 관련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의무화하면서 제작 편수를 줄인다.
1971년 180편이 제작됐으나 1972년에는 150편으로 축소하고, 외화 수입도 1971년 60편에서 1972년에는 50편으로 한정한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안보영화 역시 15편 내외를 수입 상영할 수 있도록 했다. 검열기준도 강화해 영화광고물 정화, 부실영화업체 정비 등 과거부터 실시해온 규제를 더욱 빡빡하게 조인다.
▲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식. ⓒ 국가기록원(문화체육관광부)
검열강화의 본색은 1973년 2월 영화법 전면개정으로 나타난다. 1966년에 이은 두 번째 전면개정이었다.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에 따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장기집권을 다진 박정희 군사독재는 영화제작을 허가제로 바꾼다. 기존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면 되던 등록제에서 사실상 정부가 영화사설립 결정권을 틀어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제시한 이유는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군소업자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위적 통제를 가하겠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영화업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5천만 원을 적립금으로 예치해야 했다. 국산영화 2편 제작 또는 외국영화 1편 수입할 수 있는 금액으로, 대형제작사들만 유리한 조건이었다.
또 1970년 개정 때 포함됐던 영화진흥조합을 1973년 개정에서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바꿨다. 영화진흥공사는 대작 영화의 진흥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제작에 뛰어들어 막대한 제작비를 사용해 제작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영화제작은 신고제로 했으나 영화는 상영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검열하도록 했고 외국영화 상영일수를 제한했다. 영화업자와 공연장 경영자로 영화배급협회를 구성해 영화배급업무 담당하도록 했다. 국산영화 상영일수는 120일로 정해졌다.
강화된 조건에 기존 영화사의 텃세가 이어지면서 신규 영화사가 허가받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외화 쿼터를 배정받게 되면서 1974년 10월 태창흥업(김태수), 우진필름(정진우), 남아흥악(서종호) 등 3개 신규영화사가 허가를 받는다.
▲ 영화제작사 우진필름 정진우 감독 ⓒ 우진필름 제공
당시 외화 1편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해서 상영해야 했다. 극장의 사정은 한국영화는 관객이 없고 외국영화는 관객이 많아 흥행이 되는 상태였다. 영화제작을 하는 목적은 오직 수익이 되는 외국영화수입권을 얻기 위한 것이다 보니 편법과 여러 문제가 등장했고, 위장수출이 드러나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세기극장이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대표에게 넘어가 서울극장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된다.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을 운영하던 세기상사의 실질적 소유주 국쾌남 대표가 관세법 위반과 위장수출 문제 등으로 사법처리를 받은 것이 발단이었다.
경향신문 1972년 7월 15일 자 기사에 따르면 국쾌남 대표는 관세포탈과 허위수출 혐의 등의 혐의로 구속된다. 벤츠 자동차 밀반입과 장남이 대표로 있는 미국회사에 상영 불가능한 필름을 수출한 것처럼 허위 계약서를 꾸며 수출금융자금을 융자받은 혐의였다. 1973년 4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페루 명예영사였던 국쾌남이 일본주재 페루영사가 기증한 것처럼 꾸며 벤츠600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관세를 포탈한 것이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국쾌남 대표가 타고 다니던 벤츠600 승용차는 당시 국내에 박정희 대통령 의전차량과 재벌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포함 3대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동하다가 같은 차가 옆에 지나가는 것을 봤다는 거다. 누군데 저렇게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과정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차를 들여온 것에 더해 폐필름을 수출해 이익을 본 사실이 같이 드러난 것이다,"
정 감독은 "국쾌남이 이후 사업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극장 인수를 제안했다"며 "1966년 개봉했던 과 프랑스 배우 장 폴 벨몽도가 주연한 (1975)가 대한극장에서 흥행해 극장의 수익이 컸기에 내게 빚진 마음이 있어 낮은 가격에 인수를 권유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극장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곽정환 대표와 상의했는데, 이후 곽정환 대표가 세기상사와 접촉해 극장을 최종 인수하게 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세기극장이 서울극장으로 바뀌던 1978년에는 6개의 신규영화사가 허가된다. 김기영 감독의 신한문예와 정창화 감독의 화풍흥업을 비롯해 대양필름 한상훈, 동협상사 김치한, 한림영화 정웅기, 현진영화 김원두 등이었다. 이때까지 영화사는 모두 20개였는데, 이후 영화법이 개정되는 1985년까지 독점적으로 한국영화의 제작을 책임지게 된다.
외국영화는 떠받들고 한국영화는 경시
박정희의 유신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1973년 개정된 영화법은 국산영화의 저질화를 개선하지 못하고 더욱 촉진했다. 외화는 높게 떠받들고, 방화라고 불렸던 한국영화는 경시하는 풍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외화 수입권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한국영화제작은 형식적이었고 부실했으며, 우수영화 심사 역시 쿼터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제작한 국산영화가 선정될 정도였다. 그나마 우수영화에도 들지 못하는 한국영화의 질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우수영화 선정 기준도 '10월 유신의 구현과 민족문화예술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 등 정권 홍보성 영화를 원하고 있었다.
▲ 1970년대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 간판 ⓒ 문화체육관광부
이 당시 한국영화 수준에 대해 1974년 7월 26일 자 중앙일보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하고 귀국한 강대선 감독이 "한국영화는 동남아에서 가장 낮은 수준임이 이번 영화제에서 드러났다"고 말해 영화계에 충격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강 감독은 "한국작품이 11개 부문에서 수적으로는 2위지만 본상인 최우수상은 1개도 수상하지 못했으며 한국이 출품한 영화들은 그곳 팬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아 어떤 작품이 신세계 극장에서 상영됐을 때는 일부 관람객들이 스크린에 콜라병을 던지는 소동도 있었다"고 전했다.
제약과 통제가 심해지면서 수준 높은 한국영화가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고, 이는 문제의식이 있던 영화 청년들이 1970년대 저질 영화가 양산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새로운 영화를 추구한 배경이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유신의 종말을 고한 이후 민주화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영화계에도 자율화 바람이 불어 닥친다. 1980년에 들어서며 시나리오 심의가 잠시 폐지되기도 했고, 영화법 개정요구도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제3영상그룹'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호선·홍파·이황림·정인엽 감독 등과 최인호 소설가, 이영하·장미희·정윤희 배우, 변인식 평론가 등이 영화법 개정을 요구한다.
이들은 "영화법을 영화예술과 영화인들을 위한 실질적 정책으로 전환시켜야 하고, 영화작가중심의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영화 제작할 수 있는 제도가 확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화법 개정은 시대적 요청이라면서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필름 삭제 풍토는 반강탈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도 잠시였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영화는 국민을 우민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만든 영화법이 변함없이 이어지면서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 것이다. 한국영화의 질적 하락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영화법에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은 1980년대 초반 영화운동에 나선 청년들이었다.
서울영화집단의 활동을 소개한 '중앙일보' 1982년 11월 29일 자 기사에서 홍기선(감독)은 "영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현행 영화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며 "영화제작권을 독점하고 있는 제작자나 작가의식이 결여된 일부 감독 등 기성 영화인들은 민중을 영화로부터 소외시켰다"고 비판했다.
1970년대 이후 영화계의 침체는 그 근본 원인이 영화법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송능한(감독)도 "보고 즐기고 나면 그뿐인 '소비형 상업영화'를 양산해내고 있다"며 "그것은 영화가 나아가야 할 참다운 길이 아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당시 영화계는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영화법 개정이란 큰 틀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서 입장 차가 있었다. 제작자들은 "영화사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 혼란이 야기된다며 제작 자유화를 하면 외국인의 업계 진출 막을 길이 없게 된다"고 우려했다. "제도상 문제로 제작에 참여하지 못하는 우수 영화인은 피디 시스템을 부활하면 될 것"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1960~1970년대식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독점적 제작 구조를 포기하기 싫은 것이었다.
반면 감독들은 "문호개방이 필요하고 일부 업자에게 독점권을 주고 외화 수입권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평론가들은 "영화법은 자유 제작으로 개정, 시설기준은 폐기, 수입쿼터는 공영화, 수급과 유통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영화법 개정 논의는 활발하게 전개했으나 구체적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다가 1984년 2월 13일 전두환이 "영화예술의 육성을 지시하고 획기적 발전방안을 강구하라"고 하면서 힘을 받게 된다. 공교로운 것은 전두환이 갑작스러운 지시 내리기 직전에 정진우 감독의 면담이 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정진우 감독은 "1984년 2월 초에 청와대 상춘재에서 경호실장, 대변인 등이 배석한 가운데 영화계 현안을 건의했다"며 "영화법보다는 주로 권력기관이 대종상 심사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해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치안본부(경찰청) 등이 대종상 심사에 개입하고 있는 데 대해 문제 제기를 통해 근절을 요구했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면담 직후 영화예술 육성 지시가 나온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영화제작을 20개사가 독점하면서 당시 사회적으로 여러 문제가 제기되다 보니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왔던 이야기로 이해한다"고 회상했다.
"1978년 일본에서 제작비가 모자라 교포에게 빌린 뒤 서울에서 이를 갚았는데, 이게 외화를 허가 없이 밀반출한 것이 되면서 1981년 3월 촬영 도중 구속됐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 내가 어떤 모임 자리에서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간 것이고,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3년 전 일을 꺼낸 것이었다. 권력 쪽에 있는 사람이 특정 배우 캐스팅을 원했으나 이를 거부한 것도 빌미로 작용했다. 구속 한 달 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는데, 정보기관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아 내용을 알고 있던 전두환이 이때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한번 보자고 부른 것이다."
▲ 1984년 영화법 개정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 ⓒ 문화체육관광부
1984년 12월 18일 지지부진했던 영화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1985년 7월 1일부터 발효된 영화법 개정안은 1973년 이후 12년 만에 바뀐 것이었다.
1985년 개정된 영화법은 제작 자율화가 가장 핵심이었다. 영화제작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뀐 것이다. 한국영화제작업과 외국영화수입업이 분리됐고 영화제작과 수입을 위해서는 일정 예탁금을 내고 법인체로 등록하도록 했다.
또 법인체로 등록하지 않는 독립영화제작자는 문공부의 허가를 받아 연 1편 정도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했다. 독립프로덕션이 허용된 것이었다. 외국인이나 외국법인 단체는 등록이 불가했다.
영화검열은 폐지되고 심의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공륜)가 공연법에 따라 심의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검열폐지가 아닌 검열 주체의 이름만 바꾼 것일 뿐이었다.
영화운동 입장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법이었다. 1985년 10월 발행된 계간지 4호에서 당시 편집 책임자였던 안동규(제작자)는 영화법 개정에 대한 글을 통해 '외국영화 수입자유화와 스크린쿼터 하향조정 움직임에 대한 문제'를 비판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글이 문제 될 수 있는 압박이 우회적으로 들어오면서 는 폐간했다.
새로운 영화법이 발효되면서 시작된 충무로 2.0 시대는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틈새를 영화운동은 놓치지 않았다. 신규 영화사로 하명중 감독의 하명중영화제작소가 가장 먼저 등록한 데 이어, 황기성사단, 이춘연과 김유진 등이 함께 만든 대진엔터프라이즈가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5천만 원을 예치한 후 영화사를 등록한다.
이춘연(제작자)과 함께 영화사를 만들었던 김유진(감독)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영화사에 일하던 이춘연과 계속 소통하고 있었고, 이춘연이 영화사를 만들자고 해서 어차피 나중에 돌려받는 돈이라 내가 갖고 있던 5천만 원을 내고 영화사 등록을 했다"고 말했다.
1년에 1편만 제작할 수 있는 독립프로덕션은 새롭게 부상했다. 영화운동은 이를 적극 활용해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계의 변화는 독립프로덕션의 증가로 나타난다. 한겨레 1989년 9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1987년 69개와 1989년에 18개 프로덕션이 새로 생겨났다.
전보다 개선된 것처럼 보인 영화법이었지만 서울영화집단 홍기선(감독),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변재란(영화평론가) 등이 경찰에 체포된 1986년 '파랑새 사건'에서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억지 해석을 통해 탄압의 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 8mm 영화 장면들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당시 이들에게 적용된 영화법 12조 1항은 '영화는 그 상영 전에 공연법에 의하여 설치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였다. 32조 5항은 '규정에 의한 심의를 받지 아니하고 영화를 상영한 자에 대한 벌칙' 내용이었다. 8mm와 16mm 영화에 대한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한 법 적용으로, 검열받지 않은 것을 억지로 문제 삼은 것이었다.
1985년 개정된 영화법은 2년 만에 다시 바뀌게 된다. 오로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영화시장 개방을 요구했던 미국은 통상법 301조 발동으로 한국 정부를 협박했고, 군사독재는 여기에 굴복한다. 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문화 주권 침해였다. 안동규가 에서 우려했던 문제 제기가 현실하된 것이다.
1987년 영화법의 핵심은 영화업자의 결격사유에서 외국의 법인 또는 단체를 삭제하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자와 외국의 법인 단체는 영화업자의 결격사유였다. 외국 국적자와 외국 법인 단체 대표자로 돼 있거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인 또는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법에서 이 조항을 없앤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로 민족자주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 상태에서 직배 반대 투쟁은 힘을 받는다. 여기에 영화법 개정 요구가 곁들여진다. 영화운동을 벌이고 있던 영화인들이 영화법이 아닌 영화진흥법을 제정과 검열철폐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며 투쟁을 선도한다.
'미국영화직배저지와 영화진흥법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영투위)' 소식지로 1988년 10월 8일 발간된 1호는 당시 투쟁에 임하던 영화운동의 결연함이 엿보인다. '직배저지투쟁에서 영화진흥법 쟁취투쟁으로 떨쳐나가자'는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영화투쟁 평가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미국영화의 직배라는 것이 우리 영화를 말살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동안 영화인들의 억압과 굴종, 예속, 자학, 우리 영화계의 온갖 모순 제도적 법적 억압, 가난 등 모든 응어리진 한이 이 투쟁의 동력인 것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환경에서 마음 놓고 영화 한번 만들어봤으면, 우리 이익을 대변해주고 영화 만드는 데 도움 주는 우리의 조직을 가져봤으면 하는 영화에 대한 억압된 정열의 표출인 것이다. 바로 이 모순된 영화환경과 꺾여버린 영화의 정열이 미국영화의 직접배급이란 계기를 통해 표출된 것이 지금까지의 투쟁 과정이었다.
이제 우리 투쟁을 보다 목적의식이 강한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영화인들의 이 좌절된 정열과 한을 보다 조직화시키고 논리화해야 한다. 그 요점은 바로 자신들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과 낡고 반영화적 반민족적 영화 제도를 허무는 것으로 집약된다.
곧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영화인의 참 권익을 옹호하는 영화인 대중조직을 획득하는 일과 영화창작의 여러 조건을 보장해주고 반민족적인 영화시장개방을 근본적으로 철회시키는 영화진흥법을 쟁취하는 것이 이 투쟁에서 우리가 획득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 글은 또한 당시 영화진흥법 쟁취투쟁과 미국영화 반대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극장 앞 농성에서 우리의 주요한 적이 누구이고 우리 투쟁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보다는 손님 쫓기, 제작업자와의 실랑이에 급급한 면도 있었다. 영화시장개방의 본질적 의미가 우리영화에 대한 미국영화 자본의 침략이고 우리 경제에 대한 미국의 침략이라면 당연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분노의 칼끝이 모아져야 하고 우리 영화인을 외면하고 미국영화를 도와주는 현 정권과 현재의 영화 악법에 규탄의 화살이 날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매판극장이 주요한 적이 되어 있다.
물론 극장 앞 농성 시위가 영화인 대중의 투쟁 의지를 다지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매판극장 성토는 곧바로 대미성토, 대정부규탄, 영화악법 개폐 요구로 발전되는 것이 올바른 투쟁 방향이었던 것이다. 영화인과 매판극장과의 싸움, 이것은 우리의 적이 바라는 이번 싸움의 양상이고, 대부분 영화업자들이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우리의 순결한 투쟁 의지를 선명하게 가다듬자! 그러면 이 투쟁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 당연히 영화진흥법 쟁취투쟁과 미국영화 반대 운동으로 발전해야만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영화 직접배급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또 민족적인 우리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화에 대한 제도적 법적 억압의 표현인 현행 영화 악법을 철저히 폐지하고 영화진흥법을 쟁취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본질을 제대로 규탄하기 위해서는 미국영화 직배반대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 영화시장을 미국영화 일변도로 식민화시키고 우리 문화, 우리 정서를 송두리째 강탈해온 미국영화 전부에 대한 규탄, 반대 운동으로 전국민적 확신이 요구된다.
이것은 영화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직배저지를 위한 전술적 투쟁 방법에만 한정되는 것 또한 아닌 근본적으로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투쟁, 곧 한미간의 예속 관계를 청산하려는 현재의 민족운동으로 강고하게 결합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 에 실린 만평 ⓒ 주진숙 제공
당시 소식지 발간의 실무를 책임졌던 것은 민족영화연구소의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였다. 편집장이기도 했던 이효인은 "대부분 기사 작성과 기획, 청탁 등을 나와 이정하가 했다"고 말했다.
이효인과 이정하는 직배저지투쟁이 영화진흥법 제정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전술적인 방향을 제시했는데, 조직적 단결과 국회와 사회단체, 정당 등에 대한 홍보전, 어용적 영화인협회에 반대하는 참된 영화인 조직 건설을 제안 등이었다.
이들은 영투위 이름으로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제시해 '소형영화'와 '단편영화'를 별도로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8mm 영화를 규정한 조항도 없는 영화법이 심의 미필을 이유로 영화제작자를 구속했던 모순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요구는 1996년 영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일정 부분 실현된다.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선진적인 안목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새로운 영화법을 통해 충무로 변혁을 선도한 것이었다.
한국영화운동에서 1980년 후반 영화법 개정 투쟁이 갖는 의미는 제도개혁을 위한 선도 투쟁으로서, 재야 영화운동과 충무로라는 제도권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쌓이기 시작한 역량은 1990년대 조직화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영화법 제정과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의 동력으로 작용하면서 한국영화의 발전에 기여한다.
이효인과 함께 '파랑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홍기선(감독)도 영화법에 균열을 내기 위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홍기선은 1989년 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당시 영화를 상영했던 예술극장 한마당 유인택(제작자, 예술의전당 대표)과 함께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굴복하지 않고 1990년 3월 영화법의 검열 조항에 대해 위헌 심판을 신청하며 부당한 제도에 맞선다.
당시 홍기선은1990년 4월 5일 자 '한겨레' 인터뷰 기사에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영화심의는 영화예술을 철저한 국가의 감독과 통제 아래 놓아두기 위한 전체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제도로 영화에 대해 문화부 장관이 위촉한 위원들로 구성된 공륜의 사전심의를 받도록 한 영화법 제 12조 1항은 예술과 언론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영화는 대중예술이라고 말하는데, 말 그대로 대중이 주인이 되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당국이 자의적으로 재단해 낸 영화가 아닌 영화인들의 자유로운 창작 의지와 표현 역량의 결과물로서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한다"며 "정부에서 가위를 들고 나서서 영화를 자르는 민주국가가 요즘 어디 있습니까?"라고 항변했다.
겉으로는 심의기관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검열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는 1989년 6월에는 박종원 감독의 이 공륜의 검열과정에서 야만적 검열을 자행해 논란을 일으킨다. "가장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 농민들이 가장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문제야" "부자 새끼" 등 대사와 단어를 포함해 21군데를 잘라낸 것이다.
1990년 완성된 이정국 감독의 5.18 광주를 소재로 한 첫 상업영화 도 공륜이 자행한 검열의 칼날에 100분 영화에서 25분이 잘려나가야 했다.
▲ 검열로 상당 부분이 삭제된 심의 결과표 ⓒ 이정국 제공
하지만 홍기선이 제기했던 영화 사전심의조항 위헌신청은 아쉽게도 1991년 법원에서 기각되고 만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멈출 영화운동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장산곶매 대표를 지낸 강헌(문화평론가, 경기문화재단 대표)이 나선다. 1992년 4월 를 공륜의 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한 혐의로 불구속된 강헌은 1993년 담당 재판부에 영화법 해당 조항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을 요구한 것이다.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헌법재판소로 향한다.
당시 재야 영화운동이 만든 등은 대한 미학적 성과와 함께 16mm 영화에 관심을 높아지게 한다. 영화인들의 투쟁이 강화되자 김영삼 정권은 1995년 소형영화와 단편영화 등을 정의한 내용의 영화진흥법 제정안을 마련한다.
하지만 당시 영화운동은 검열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이를 시큰둥하게 받아들인다. 당시 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회 김동원 위원장과 제작가협회 김혜준 연구관 등은 심의를 완전등급심의로 전환하고 소형 단편 등 극장 상영을 하지 않는 영화에 대한 심의 철폐, 비상업적 영화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 지원책을 제시하는 영화진흥법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정부가 이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뜻밖의 반전이 생겨났다. 1993년 10월 강헌이 제기한 사전심의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3년 만인 1996년 10월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검열이 위헌으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 폐지 후 대체 기구로 1997년 10월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만들어졌으나, 공륜과 다를게 없다는 비판을 받다가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이후인 1998년 영화진흥법이 전면개정되면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출범한다. 1922년 시작된 사전 검열의 역사가 76년 만에 종지부를 찍은 순간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시나리오검열 폐지에 이어 영화운동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뤄낸 가치 있는 성과였다. 등급심의가 검열의 변형으로 작용하려는 과정에서도 결연한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다만 당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던 초기였기에 영화운동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거대 자본이 정치 권력을 대체한다는 것을 깊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안동규(제작자)는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바뀐 이후 중소기업업종인 영화제작업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대기업의 영화산업 장악이 점차 늘어났다"고 말했다.
기존 영화법 시행령의 등록기준에는 5천만 원 예탁금에 대해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의하여 영화제작업자 등을 조합원으로 하여 설립된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종합촬영소의 건립목적을 위하여 출자하는 자인 경우에는 예탁금의 2분의 1까지 이와 동액의 당해 출자금의 출자로써 예탁한 것에 갈음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영화진흥법에서는 이 조항 자체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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