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허성권 KBS 노동조합 위원장. 임현동 중앙일보 기자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관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ㆍ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후략)’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1987년 1월 15일 자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제목은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입니다. 이 기사를 쓴 신성호 전 기자(현 성균관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당시 일을 기록한 책 『특종 1987』에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이 2단짜리 기사로 국내 모든 언론사가 놀라고 관련 출입처 기자들에겐 비상이 걸렸다. 기자들은 곧바로 확인 취재에 들어갔다. 검찰과 경찰 관계자들은 “아는 바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썼습니다.
그 책에 ‘1월 15일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중앙일보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문치사’가 아니라 ‘변사’라고 강변하면서 ‘오보’에 책임지라고 압박하기도 했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검찰이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렇게 사건 내용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1월 14일 오전 8시 1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께 아침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께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쯤 사망하였음.’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욕조에 채운 물에 머리를 강제로 넣은 ‘물고문’이 사망 원인이었습니다. 언론의 후속 취재가 이 사실을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동아일보의 기여가 컸습니다.
만약 고(故) 박종철씨 사망을 87년 1월 15일에 중앙일보가 보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며칠 뒤에 다른 언론사에서 보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사건이 ‘깨끗이’ 정리됐을 때였을 것입니다. 가혹 행위 의혹을 제기하는 보도가 나왔다 해도 이미 장례가 치러졌고, 관련자 입막음과 관련 증거 폐기 작업도 끝났을 것입니다. 독재 시절의 미스터리 ‘의문사’ 리스트에 이 사건이 추가됐을 것입니다.
한 번 더 ‘만약’입니다. 당시에 군사 정부가 ‘언론사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중앙일보가 ‘확실한 증거 확보’ 때까지 보도를 미루다가 결국 보도가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종 1987』을 보면 신성호 기자가 1월 14일 아침 취재에서 네 명의 검찰 간부를 통해 사건 내용을 파악합니다. 그중 두 명이 ‘고문 가능성’까지 언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어 언론사마다 다수의 소송에 시달리고 있었다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이 취재 내용을 보고한 신성호 기자에게 추가 취재를 해 ‘스모킹 건’을 찾으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검찰 간부들이 그런 얘기한 적 없다고 하면 그만이고(언론사가 구체적 취재원을 밝힐 수도 없습니다), 정부와 경찰이 최소 수십억원짜리 손해배상 소송으로 괴롭힐 게 뻔히 보이니까요.
시대가 바뀌어 정부가 투명해졌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꼭 그렇지도 않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 중이었던 김태우 전 수사관은 3년 전에 환경부 블랙리스트, 유재수 감찰 무마, 울산시장 선거 개입을 폭로했습니다. 그때 청와대와 여당에서는 거짓 의혹 제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전하는 보도에는 ‘가짜뉴스’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흐리고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검찰 수사와 재판으로 그가 주장한 것이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만약 언론이 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관련 사실에 대한 추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검찰 수사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의 주장은 ‘허위 사실 유포’로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징벌법’이 있었다면 김 전 수사관의 폭로는 신문에, 방송에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되는 것이 그 법을 원하는 사람들이 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당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87년 시민혁명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또 이낙연 전 총리와 윤영찬ㆍ김의겸 의원은 언론사와 기자들이 위축되면 보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잘 알 수밖에 없는 기자 출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희대의 악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는 곳이 바뀌면 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이 진리인가 봅니다.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도 이런 법을 만드는 움직임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1957년에 결성된 이 클럽이 특정 사안에 대해 성명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관련 기사를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