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당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책으로 엮은 미국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들을 통해 이른바 미국의 ‘침묵의 세대’와 ‘잊혀진 전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한국전쟁 정전협정 68주년을 맞아 ‘한국 참호에서 온 편지들’의 저자 엘리자베스 벤투리니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박형주 기자입니다.
기자)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부친이 전쟁 당시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을 출판하셨는데요, 먼저 청취자를 위해 본인과 아버지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벤투리니 씨) “네. 제 이름을 엘리자베스 벤투리니입니다. 현재 캘리포니아 남부에 살고 있고요, 대학 진학 관련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고요. 이름은 루이스 조셉 벤투리니입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셨죠. 아버지는 스무 살 때인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복무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 모아서 지난해 한국전쟁 정전기념일에 맞춰 책을 출판했습니다. 책 제목은 ‘한국 참호에서 보낸 편지들(Letters from a Korean Foxhole)’입니다.”
한국전 참전용사 루이스 조셉 벤투리니 씨. 사진 제공 = 엘리자베스 벤투리니.
기자) 아버지의 편지를 책으로 만들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벤투리니 씨) “2017년 처음으로 아버지 편지를 잘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편지들을 그냥 신발 상자에 넣어서 보관해왔습니다. 편지에서 본 아버지의 전쟁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린 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다른 참전군인의 가족이나 자녀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왜냐면 이 편지들을 통해 ‘침묵의 세대’로 불리는 이들의 삶에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전쟁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습니다. 많은 참전군인이 그렇듯이 저희와 전쟁 이야기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처음 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버지는 ‘누가 궁금해 하겠어? 이미 수십 년 전 일이야’라고 반응하셨죠.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경험이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 것이라고 설득했고, 이후 약 2년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본격적으로 책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는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19년 11월 돌아가셨는데요, 아마 책을 보셨다면 자신의 젊은 시절이 기억되는 것을 무척 기뻐하셨을 겁니다.”
기자) 편지에 나타난 아버지의 20대 시절, 그리고 한국전쟁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벤투리니 씨) “1950년 12월 아버지는 20살이 됐고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물론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편지를 통해 아버지와 다른 젊은이들이 신병훈련소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가는 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일상 임무는 무엇인지에서부터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코만도 작전’ 등 최전선의 전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편지에서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키려는 흔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형인 율리오에게 쓴 편지에 전쟁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말미에는 꼭 ‘엄마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돼’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또 저희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기자) 참전군인 중에는 전쟁의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벤투리니 씨의 아버지는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벤투리니 씨)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도 처음에는 어려운 시간을 겪었다고 합니다. 처음 고향에 와선 가족들과 군 복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면서 그때의 일을 잊고 싶어 했다고 하더군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겪은 약간의 우울감이 한국전 참전군인에겐 흔한 경험이라는 것을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때는 다 그랬죠. ‘다 잊어버려.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하고 어서 일상으로 돌아가’ 이런 세대의 산물이셨던 거죠. 아버지는 본인을 결코 전쟁 영웅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인정도 감사도 바라지 않았고 희생자처럼 행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미국에서는 참전용사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을 잊고 있지만 젊은 세대 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과 희생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아버지의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주위 반응은 어땠나요?
벤투리니 씨) “저희 가족들이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특히 저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은 당시 자신들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들의 이름이 편지에 등장한다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촌들은 저희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거나 살라미(이탈리아 소시지)나 과자 같은 것을 만들어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참전용사 가족들도 공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특히 한 베트남 참전군인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와 거의 흡사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도 전화도 없었던 당시에는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가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잖아요. 당시 군인들에겐 하루 일과 중 편지 전달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고 하더라고요.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대하고 편지를 읽는 몇 분간은 그들이 참호 속에 있는 산등성에 있든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며 웃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한국 참호에서 보낸 편지들’ 저자 엘리자베스 벤투리니 씨. 사진 제공 = 엘리자베스 벤투리니.
기자)책에 소개된 편지 중 벤투리니 씨가 가장 좋아하는 한 대목의 낭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벤투리니 씨) “1951년 5월 31일 쓰신 편지를 가장 좋아합니다. 당시 아버지가 한국으로 파병되는 선상에서 쓴 편지인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 번도 가본적 없는 낯선 곳으로 향하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20대 젊은이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목요일입니다. 3~4일은 더 가야합니다. 밖은 마치 지옥처럼 안개가 자욱하지만 바다는 잠잠합니다. 어제 우리는 ‘국제 날짜 변경선’을 지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이죠. 물론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어서 서둘러서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하루 종일 우리는 카드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고 사탕이나 과자를 먹습니다. 이곳은 지옥처럼 붐비고 무엇을 하려고 해도 줄을 서야 합니다…편지는 내일 늦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게 괜찮습니다.]
기자) 아버지에게 한국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벤투리니 씨) “책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와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또 텔레비전을 통해서 1951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께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아웃트로: 지금까지 한국전쟁 참전군인이 당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 ‘한국 참호에서 온 편지들’의 저자 엘리자베스 벤투리니 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