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정말 점령군이었을까? 역사학자들이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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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올바른 역사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출마를 선언한 지난 1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단계에서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라고 밝힌 것이 도화선이 됐죠. 이를 두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 지사가 역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탄생을 폄훼한다고 비판하면서 전선이 넓어졌습니다.
사실 역사관 논쟁은 인물을 검증하다 보면 한 번은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고 정책을 펼칠 것인가’는 국민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죠. 독립운동을 연구해 온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역사 전쟁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으로도 또 일어날 거라는 거죠.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이번 논쟁을 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대선 후보의 역사관이 중요한 만큼, 국민에게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는 지적입니다. 정치권이 공방에 급급한 나머지 사료로 검증된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것이죠. 일부 사료가 제시되기는 했지만 ‘미군도 점령군이란 단어를 썼다’는 정도를 주장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서울 수복 후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정부 환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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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은 미군과 소련군 모두 점령군이었다는 것"
결국 논쟁이 사그라지고도 궁금증만 남았습니다. 해방 직후의 미군은 정말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왔을까요? 일각의 주장대로 소련군은 해방군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16일까지 본보 취재에 응한 연구자들은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미군과 소련군 모두 점령군이었다고 본다”고 답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아닌 해방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점령은 한 국가가 타국의 영토를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적국을 무력을 통해 지배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죠.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과정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일본이 지배하던 땅(한반도)을 점령하려고 두 강대국이 군대를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점령과 정복은 구분해야"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완범 교수는 2000년대 이후로 역사학계에서 정설은 미군과 소련군 모두를 점령군으로 본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를 영토로 두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국익을 위해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한반도에 친미적이거나 친소적인 국가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에 미군과 소련군을 일제를 몰아낸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한국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은 스스로에 대해 점령을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 교수의 저서 ‘한국해방 3년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양국에 한반도는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지지만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땅이었습니다. 어느 강대국의 독점적 소유로 넘어가면 타국에 대한 공격 기지가 될 위험이 있었죠. 그래서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바로 독립시키지 않고 적절한 과정(신탁통치)을 먼저 거치는 방안이 미국과 영국, 중화민국이 참여한 1943년 제1차 카이로 회담부터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일단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의견이 모아졌고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함경북도 경흥군에 진입, 같은 달 26일에는 평양에 도착합니다. 미군은 9월 8일 인천으로 상륙했죠.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이트에 올라온 1945년 9월 9일 자 맥아더 포고문에는 '점령', '점령군'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우리역사넷' 홈페이지 캡처
“소련군 포고문이 부드럽기는 했지만…”
이 교수는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적국에 진주한 점령군의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9월 2일과 7일에 발표된 하지 장군과 맥아더 장군의 포고문이 고압적으로 작성된 까닭도 그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대한 반란을 금지한다거나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 점령군에 반항하면 엄벌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죠. 당시의 미군은 한반도를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전진기지로 생각했지 독립된 단위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분석합니다.
소련군 역시 점령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8월 15일 자로 추정되는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포고문은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라는 우호적인 표현으로 끝났지만 두 달 뒤에 발표된 북조선 주둔 소련군 25군 사령관 성명서는 미군과 마찬가지로 허가와 금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교수는 8월 15일의 포고문은 조선인에게 보내는 ‘덕담’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실질적 '주의사항'을 전달한 문서의 내용과 정책은 미군과 소련군이 비슷했다는 거죠.
“두 군대가 어떤 정책 펼쳤는지 살펴야”
동북아역사재단의 조건 박사 역시 단어에 매달리기보다 미군과 소련군이 펼친 정책의 성격을 살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시계를 돌립니다. 일본 제국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 미군이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도 살펴보자는 거죠. 군대가 주둔을 시작할 때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 박사는 강조했습니다.
조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8월 15일에 우리가 해방됐지만 당시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습니다. 24군단의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 장군은 그 거리만큼이나 한반도를 몰랐어요.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기도 했지만 사실상 미국에 한국은 잊힌 왕국 같은 지역 아니었겠습니까? 남한을 점령해야겠는데 정보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누구에게 연락하느냐?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과 전보를 주고받습니다. 당신 누구야, 어떤 직책이야, 책임이 있는 사람인가, 남한 사회는 어떤 상황이야 등등 온갖 정보를 묻습니다. 일본군은 남한 사회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기운이 다분하다고 답합니다. 그래서 미군이 9월 8일 상륙 전까지 한반도의 치안권을 일본군에 줍니다. 그리고 무장을 해제한 뒤에도 일본군이 일정 수준의 무기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미군이 한반도를 바라보던 시각은 패전국이었던 일본군과 식민지배 당국자들의 시각과 일정 부분 유사했다는 것이죠. 미군의 초기 정책이 상당히 억압적이었고 점령군의 성격을 드러냈다는 겁니다. 조 박사는 점령 초기 미군의 정책은 한반도 주민들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것은 일본군이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 미군의 눈을 가린 탓이기도 했다고 설명합니다. “미군이 9월 9일 서울의 조선총독부에서 항복 조인식을 열었죠. 그때 일본 측에서는 조선 총독과 조선 안의 육해군 사령관이 참석했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지점이죠. 미군이 한국을 해방시키려 왔다면 (현재로 치면) 대한민국 사람도 거기에 들어갔어야죠. 그렇지 않았거든요.”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통치권 이양문서에 서명하는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 미국의 존 하지 중장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적 사실 인정해야 국익에도 도움”
‘미국은 우리에게 엄청난 은인이고 최고의 동맹인데 어떻게 점령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조건 박사는 국익을 위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변했습니다. “해방 직후의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현재의 미군이 점령군이 되는 것은 아니죠. 반대로 미국이 지금 우리에게 선한 존재라고 해서 이전에 있었던 미국의 역사가 모두 선한 행동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선과 악을 덮어씌우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될까요?”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습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수록 사회에 도움이 되지만 역사적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한국의 외교에서 미국의 동맹이 가장 중요하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란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죠.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서 발을 빼려고 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과 진실되게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외교무대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겠죠.”
"사실과 해석은 구분해야"
물론 역사적 사실이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안을 두고 역사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죠. 그럴수록 정치인의 주장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평가와 해석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이 국민에게 필요하다고 김정인 교수는 설명합니다. “역사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이번처럼 역사학자가 ‘이것이 팩트(사실)’라는 식으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팩트 체크가 어려운 논제들도 많거든요. 그러면 해석을 두고 어떤 것이 주류인지 다투는 논쟁이 되는 거죠.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고 따져보는 자세가 시민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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