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을 차지한 안산. 도쿄/연합뉴스
“어쩌면 언젠가는 신의 진노를 사서 강력한 미지의 병원체가 전세계에 ‘팬데믹’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죠.”
2013년 일본 만화 〈시마 회장〉에 이런 대사가 나올 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현실이 됐다. 2020년 도쿄올림픽은 근대 올림픽 역사상 두 번째로, 제때 열리지 못하고 연기되어 열린 올림픽이다. 1944년 런던올림픽이 2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 못하고 4년 뒤인 1948년에 런던에서 열렸으니 올림픽 역사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전쟁 수준의 위기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2021년 7월 올림픽 역사상 초유의 무관중 개막식이 열렸다. 나는 이웃 나라에서 하는 올림픽 개막식이라 시간이 되면 무리해서라도 가서 보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여의도의 호프집에서 개막식을 구경했다.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입장하는 일본 선수단. 도쿄/연합뉴스
1964년과 거의 흡사했던 일본
개막식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각 참가국 의상이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올림픽은 일종의 국가 이미지 경연 같은 성격을 띠고, 각국 선수단의 개막식 의상은 각 국가의 최신 버전 이미지라 볼 수도 있다. 개최국 일본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눈 쌓인 벌판처럼 새하얀 개회식장에 일장기를 들고나오던 사람들은 1964년 도쿄올림픽의 일본 선수단 유니폼과 거의 흡사한 옷을 입었다. 빨간색 바지에 흰색 블레이저. 한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색대비다. 1964년 올림픽 이후로 도쿄는 세계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며 국제사회라는 무대의 주요 선수로 다시 뛰어들게 된다. 그런 영광을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그 의도는 관중이 없는 새하얀 경기장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개막식과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장면을 보면 세상이 이만큼 변했나 싶다. 1964년 올림픽 선수단은 모두 군인들처럼 발과 손을 맞추어 도열한다. 옷도 모두 똑같이 맞추어 입었다. 바지나 치마에 셔츠와 타이. 서양 근대의 격식에 맞춘 복식은 철저히 지키고, 타이와 재킷의 색만 다르게 했다. 2021년의 선수단은 훨씬 자유롭게 걸어 다니면서 인사한다. 옷도 한층 다양해져서 이제 옛날처럼 정장을 입고 입장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영국과 미국 같은 국가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입장한다. 민속 의상을 입은 몇몇 폴리네시아나 아프리카 국가 특유의 전통만 여전하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입장하는 일본 선수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누리집 갈무리
기능성 의류 각축장
올림픽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점점 발달하는 기능성 의류의 발전이다. 공기저항이 줄어든다면 육상 기록이 빨라질 수 있고, 기록이 빨라지는 건 모든 스포츠 선수의 목표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퍼포먼스에 여러모로 일조하는데, 그중 패션 기술도 포함되는 셈이다. 이쪽 부분에서는 나이키가 여러 가지 기록과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나이키는 2016년 공기역학 실험을 거쳐 공기저항을 줄이고 선수들의 힘을 극대화하는 별도의 유니폼을 개발했다. 몸에 붙여서 마찰을 줄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일부 러닝 전문가들은 ‘도핑’이라 칭하기도 한다.
육상 선수의 신발 역시 발전하는 중이다. 기존의 경주용 신발은 에프원(F1) 자동차처럼 무게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경량화에 치중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발바닥 부분에 탄력 소재를 사용해 땅을 박차고 달리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다시 되돌려주는 것이다. 나이키는 이 기술을 개발하며 육상 선수의 기록이 최대 4%까지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 고개를 저으며 웃었죠. 스포츠 브랜드는 다들 그런 말을 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어요.” 러너 겸 물리학자 앨릭스 허친슨이 캐나다 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도쿄올림픽은 그 신발을 신은 선수들이 대거 나서는 최초의 대회다. 오히려 2020년보다 1년 늦었기 때문에 더 많은 선수가 신형 러닝화를 신고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에 육상 신기록이 속출한다면 새로운 러닝화 기술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올림픽 패션에서 중요한 건 옷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 옷은 패션과 치장의 일부일 뿐이고, 선수들의 유니폼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엔 너무 제한이 많은 옷이다. 일부 선수들이 옷 말고 다른 부분에 신경을 쓰는 이유다. 의외의 패션 포인트가 손톱이다. 손이 클로즈업되는 여성 육상 선수 중에는 네일아트를 열심히 하는 선수들이 있다. 추억의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미국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는 길게 기른 손톱에 대단한 네일아트를 선보인 적이 있다. 여성 육상 선수 네일아트라는 소소한 전통은 21세기에도 이어진다. “나는 100m를 늘 ‘캣워크’라고 말해요”라고 말한 사람은 여자 100m 준결승에 참가한 선수 아샤 필립이다. “그때가 우리가 빛날 시간이에요. 카메라가 우릴 비추고, 뛰는 게 안 예쁘다면, 어디 하나라도 예뻐 보이고 싶죠. 보기 좋아서, 마음이 좋으면, 달리기도 좋은 거예요.” 아샤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네일아트를 한 긴 손톱으로 화제가 된 미국 육상선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한겨레 〉자료사진
스포츠와 ‘털’
머리카락은 조금 더 복잡하다. 생각보다 많은 종목이 체모 관련 규정을 둔다. 복싱은 수염을 기르는 게 금지되나 윗입술을 덮지 않는 콧수염은 가능하다. 체조 선수의 머리는 시야를 가릴 일이 없을 만큼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한다. 육상은 상대적으로 금지가 덜하지만 광고주의 정체가 드러나는 헤어스타일 등이 금지된다. 여자 배구는 선수의 등 번호가 보여야 하므로 긴 머리를 올려 묶어야 한다. 동시에 사람의 머리카락은 자신을 꾸미는 수단이기도 하다. 독일의 여성 100m 대표 선수 타탸나 핀토는 자신의 긴 머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하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하고 싶은 머리였고, 그 머리에 만족하고, 그래서 좋은 성적이 날 듯하기 때문이었다. 운동과 털, 미적 털과 기능적 털 사이의 미묘한 고민은 올림픽의 현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안산 선수의 머리털은 어디에 속할까. 어디에 속하긴. 신경 쓸 필요 없는 분류에 속한다.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 외 사소한 요소에 대해 이렇게 길게 논하는 건 인간 극한의 경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프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양궁 선수의 짧은 머리는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선택이다. 햇빛을 가리는 벙거지를 쓰니 육상 선수처럼 머리카락 휘날리는 멋을 부릴 수도 없고, 가만히 있는 사람도 쓰러지는 도쿄의 여름 더위를 생각하면 짧은 머리가 열 처리에도 효과적이다. 안산 선수의 헤어는 일류 프로페셔널의 냉철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3관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3관왕의 디테일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박찬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