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함과 천진함 동시에 갖춘 배우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시작이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걸 연기로 피력하는 거죠. 지금 이렇게 조용히 있지만 내게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라고.” 사진가 윤송이 제공
배우 이정은 약력
1991년 연극 으로 데뷔했다. 영화 등에 출연했으며, 백상예술대상 티브이(TV)부문 여자 조연상,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즈 신스틸러상 등을 수상했다.
“역할을 통해 배우죠. 내가 모자라니까 어떤 역이든, 모든 역에서 배우는 게 있어요.”
2019년 여름, 영화 촬영을 마치고 흑산도에서 돌아온 배우 이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그 말을 품고 지냈다. 어느 때 누구를 만나건,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사람, 배움의 가능성 아래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은 낡지도, 닳지도 않는다. 연기 외에 자신을 드러내길 조심스러워하는 배우들조차도 이정은 배우에 대해서만큼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그와 인터뷰하는 당일에도 “이정은,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배우 김명민 인터뷰가 포털 뉴스난을 채웠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한두가지만이 아닐 것이다. 다채로운 자질이 한 사람 안에 절묘한 비율로 배합돼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인터뷰 중에도 이정은의 ‘절대 비율’이 빛을 냈다. 매 순간 자신을 최대치로 끌어다 써보려는 사람의 엄격과 충실함이, 타인에게 쉽게 감탄하고 경이로워하는 품 넓은 천진함이 툭툭 튀어나왔다. 2021년 6월 중순, 다음 작품 준비로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정은 배우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기생충’ 이전 이름 없는 ‘댁’ 연기
이정은이라는 이름 한 반에도 여럿
색채 없는 이름 배우생활 도움됐죠
작은 역할 있을 뿐 작은 사람은 없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새삼 필모그래피를 다시 봤습니다. 영화 의 ‘국문광’ 이전까지는 극중에서 이름으로 존재한 적이 거의 없더라고요. 대부분이 화순댁, 금촌댁, 가거댁, 함안댁….
“댁, 댁, 댁. 맞아요.(웃음)”
―말 그대로 ‘무명’인 것이죠. 캐릭터로서도 배우로서도 이름 없는 시간을 오래 보냈어요.
“당시에는 ‘왜 이름이 없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어요. 함안댁 하면 함안 사람 어디쯤을 상상하며 여러가지를 해볼 수 있잖아요. 이름이라는 정확한 규정이 있으면 갇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으니까. 왜 이정은이라는 이름만 해도 우리 때는 한 반에
5∼6명씩 있었어요. 색채가 없지, 이름이. 그래서 연극할 때만 해도 다른 활동명을 가져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거든요. 근데 이 또한 돌아보면 ‘색채 없는 이름’이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무명의 홀가분함 속에서도 작은 역할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영화 에서 김혜자 배우의 멱살을 잡을 때도 그렇게 혼신을 다해.(웃음) 무명으로서 존재할 때도 짧으면 짧은 대로, 미미하면 미미한 대로 누구나 자기 몫의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 요즘 대중이 사랑하는 중견 배우의 공통점 같아요. 이정은 배우도 그중 한명이고요.
“학교 다닐 때 주변에 연기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잖아요. (이정은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자기 피아르(PR) 잘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주목받는 일에 자연스럽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술자리에서 요란스럽고.(웃음) 그런 사람 한명 있으면 나머지 7~8명은 조용히 있죠. 저 역시 조용한 사람 중 한명이었고, 그런 친구들을 바라보는 걸 또 좋아했어요. 근데 조용한 이들이 아주 개인적으로 친구들 만나서는 ‘나 여럿이 있지 않으면 되게 재미있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에게도 다 각자의 삶이 있어요. 역할도 마찬가지죠. 존재하는 사람을 존재로서 대해야겠죠.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 낭비되는 역할은 없다고 봐요. 그 명제 아래 창의성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하는 게 조연들이 할 일이고요. 무명의 역할이었음에도 무명의 존재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 그래서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고요.”
연극 연출할 땐 가능성을 보았어요
무명의 존재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게
두려울 땐 마음 잡고 ‘충실한 하루살이’
독립영화 오디션 보며 카메라울렁증 극복
―존재의 크기를 견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할까요?
“제가 연극 연출을 했잖아요. 연출하면서 배운 거죠. 역할이 작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애들한테 ‘작은 역할은 있지만, 작은 사람은 없다’고 늘 이야기했었어요. 기대하지 않았던 역할이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때 사람들은 더 크게 놀라요. 나는 이런 사례를 무대에서 많이 봐왔으니까 그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연출이고 싶었어요. 주인공에게는 이야기 속의 분명한 역할과 계획이 정해져 있잖아요. 주인공이 이끄는 큰 맥락 안에서 조연들이 못이 튀어나오듯 의외성을 툭툭 내보이면 이야기가 풍성해지죠. 그래서 연출들이 단역들을 세심히 봐요. 예상치 못한 걸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르는 거예요. 그렇게 보석을 발견해내는 거죠.”
―아름답게 들리지만 외롭고 고독한 일이에요.
“그런데요, 아무도 나한테 관심을 갖지 않는데 나조차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살려줄 수 있겠어요? 내 역은 나 아니고는 아무도 못 해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시작이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걸 연기로 피력하는 거죠. 지금 이렇게 조용히 있지만 내게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라고.”
―조용한 피력을 거듭하던 와중에 지금과 같은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었나요?
“아우, 전혀 몰랐죠. 매일이 하루살이였어요. ‘오늘 이런 일이 있었지? 내일 또 그랬으면 좋겠다’ 하면서 잠들고. 그러다 내일 기대하던 일이 생기면 ‘아유, 감사합니다’ 하면서 또 하고. 계획도 많이 세웠는데 계획대로 된 게 없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코로나19 속에서 콘텐츠 환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 이러다 금방 뒤처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두려움조차 못 느낀다고 말하면 그건 솔직하지 않은 거고. 두려울 때마다 마음을 잡는 거죠. 지금까지 내가 연기할 수 있었던 게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갈 길도 마찬가지예요. 오늘을 잘 살면 내일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니 오늘 할 일 미루지 말자 하면서.”
―충실한 하루살이로 살아가는 와중에 믿는 것은 무엇이었어요?
“곁에 잘 만드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내가 조금 힘들 때 잡아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우정 출연도 많이 해요. 뿌려놓는 거예요.(웃음)”
부끄러움까지도 정면으로 보려고 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본인보다는 함께하는 동료들에게서 찾았네요.
“영화 할 때 이준익 감독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네가 운이 좋아서 잘됐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운 좋은 사람 옆에 있어라. 운 좋은 사람을 발견하는 눈을 갖는 게 인생 후반부에 해야 할 일이다’라고. 본인은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시다고.(웃음) 눈이 흐리면 그런 사람도 못 찾겠죠. 성실하게 잘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실과 열심이야말로 운의 기본값이니까. 그런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죠. 보고 있으면 힘이 나고 자극을 주는 사람들을.”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 중 하나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거죠. 하루의 촬영을 끝내면 돌이킬 수도, 누군가를 탓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죠. 이 점이 배우를 힘들게 하고 또 성장하게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굴을 좀 파는 편이에요. 어떤 실수에서만큼은 내 자신이 도저히 용서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연기를 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배우의 직업적 속성이 어렸을 때는 독이었죠. 밤새 후회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러면서 몸도 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몇날 며칠 앓아눕는다고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닌 걸 아니까, 실수를 정면으로 보려고 해요. 밤새 고민해봤자 당장 누군가에게 전화할 수도, 쫓아갈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일찍 자고 아침에 고민하자’ 쪽으로 바뀌었고요.”
―영화 당시 연기가 어색하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고 어딘가에서 말씀하셨는데, 그때 유독 굴을 파지 않으셨을까 짐작됩니다.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정은 배우의 유일한 흑역사.(웃음)
“에휴, 그 외에도 흑역사 많아요. 도끼로 난도질하는 단편영화도 있고. 안 그래도 어제 피디에게 전화가 왔어요. 상영회와 지브이(GV·관객과의 대화)를 한다고 오라길래 ‘나 못 가. 나도 알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영화에 폐가 되었잖니’ 하니까 ‘폐가 될 정도로 네가 작품에 많이 나오진 않아’ 하더라고.(웃음) 그때만 해도 너무 부끄러웠죠. 그럼에도, 그 부끄러움까지도 정면으로 보려고 했었어요.”
―그 후 대중 영화를 찍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습니다. 필모그래피에서도 8년이 텅 비어 있어요.
“ 이후로 작업이 없었어요. 아무도 안 부르더라고. 친구가 부르는 영화에는 폐가 될까 걱정돼 가고 싶지가 않고. 어떻게 하면 영화를 다시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작은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했어요. 독립 영화 오디션을 계속 봤어요. 어떤 한 해에는 그렇게 서른편을 찍기도 하고요. 비어 있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사부작사부작 뭘 계속 했어요. 그렇게 몇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덜 부담스러워지더라고요. 스스로 훈련을 한 거죠. 근데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실패를 하든 어떻든.”
“배우를 시작하던 때만 해도 날카로웠어요. 늘 논쟁하고, 싸우고 싶었던 거 같아.” 사진가 윤송이 제공
정의롭지 못한 것에 ‘버튼’ 눌렸죠
―본인의 어떤 기질이 배우를 선택하게 하고, 배우로 살아가게 하는 것 같아요?
“‘삐딱선’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어요. 외모만 보면 순종적으로 보이나 봐요. 상대방 말도 경청하려는 편인데 문제는 잘 듣고 나서 꼭 뭐 하나를 덧붙인다고. 예전에 오지혜 선배가 ‘너는 꼭 말끝에 ‘그걸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 ‘꼭 그럴까?’ 하고 토를 단다’고 하더라고요. ‘어, 나도 그래, 나도 똑같아’ 하고 지나갈 법한 것도 꼭 말끝마다 토를 단다고요. 글쎄, 그런 삐딱한 기질이 배우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아 했던 청소년기의 삐딱함이 배우를 시작할 수 있게 했고요. 지금은 삐딱함이 제 나름의 도전적 측면에서 발휘가 되니까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는 거 같아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버튼’ 눌렸죠
지금은 헤아리는 폭이 더 열린 듯해요
배우는 인간을 한쪽만 보면 안되니까
―기질이라는 것은 사회화를 거치며 마모되거나 덧붙여지기도 하잖아요. 지금의 삐딱함과 과거의 삐딱함의 차이를 느끼나요?
“마모가 돼 나쁜 쪽으로 갔다기보다는 지금은 여유 있는 삐딱함이죠. 배우를 시작하던 때만 해도 날카로웠어요. 늘 논쟁하고, 싸우고 싶었던 거 같아. 특히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어요. 기성세대라고 하면 아버지가 대표 격인데 아버지에게서 종종 보이던 늘 무언가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그렇게 싫었던 거 같아. 왜 꼭 이런 거 물어보잖아요. ‘걔네 집은 뭐 하고 사니?’ 같은 너무 싫은 질문. 같이 티브이(TV)를 보다가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아버지한테 시비를 걸었어요. 근데 다를 수 있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이 쌓여 영향을 미쳤을 텐데 나는 왜 그 다름을 항상 싸우는 방식으로만 대응했을까. 남에게 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자기 삶을 영위한 분을 왜 그렇게까지 단칼에 베어버리고 옳지 않다고만 했을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사셨다 박수 치는 게 자식인데.”
―요즘은 그렇게 특정 요인에 분노하는 걸 ‘버튼 눌리다’라고 표현하는데요. 당시 이정은 배우의 버튼을 눌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정의롭지 못한 것. 앞뒤가 맞지 않는 것.”
―버튼이 자주 눌렸겠습니다.
“무조건이죠. 띡띡띡띡. 가출도 하고.”
―가상의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현실의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연결되는 걸 느끼시나요? 끝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처럼요.
“상호작용이 있죠. 그런 게 배움이고요. 어떤 면을 볼 때 헤아리는 폭이 좀 더 열리는 건 있어요. 배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단편적으로만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사람이 한가지 특성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늘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삼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요. 그게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으로 발현됐을 수도 있어요.”
―사회 안에서도, 촬영 현장 안에서도 중간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간자적 역할에 대해 생각하시나요?
“중간자보다는 좀 더 윗세대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이 둔탁해질 때면 나이를 먹고 있구나 느끼기도 하고요. 동년배 동료들과는 ‘후배들에게 말로 설명하지 말고 사는 걸로 보여주자’고 이야기해요. 현장에서 ‘얘, 연기는 이렇게 해. 저렇게 해’ 할 필요 없는 거죠. 어떤 분들은 ‘네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게 걔들에게도 좋지 않겠니’라고 하시는데요. 근데 내 말만 하다 보면 가르치게 되잖아요. 같은 일을 먼저 겪었다 해도 그 사람은 충분히 다른 지점에 도착할 수도 있는 건데, 단지 내가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방향을 먼저 말해서 초를 치는 경우는 만들지 말자.(웃음) 선수를 쳐서 그 사람에게 해결책을 주거나 답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 대신 내 삶에 대해서는 내가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 같아요. 가르치기보다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게 맞지.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은 다 그렇게 존재하는 분들이셨더라고요. 돌아가신 김영애 선생님도 항상 그러셨어요. ‘내가 이런 부분은 부족했어. 그래도 너 많이 해봐. 많이 하면 알게 돼.’ 그런 선배들처럼 살고 싶어요. 반대로
윗세대 분들에게는 ‘선생님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많이 여쭤보죠. 그게 중간자가 할 일인 거 같아요. 그리고 요즘 젊은 친구들은 배우로서 자긍심도 크고, 그만큼 준비를 해요. 그러니 가르칠 것도 없지. 오히려 내가 묻고 들을 게 더 많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드라마 종영 때 김태리 배우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긴 촬영 기간 중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까 이정은 배우와 새벽에 산책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극중 의상인 한복을 입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촬영지 근처를 걸었다고요.
“더운 날이었고 벌레도 많았는데 내가 앉아 있던 정자에 태리씨가 왔어요. 대기 시간이 길어지니까 같이 마냥 걸었죠. 이 사람이 걷는 걸 좋아하더라고. 작품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별이 참 많이 떴다. 지금 하는 거 기분이 어떠니. 나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 같은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지만 드라마 중반쯤이었어요. 별이 있고, 태리와 내가 있고, 동네가 무척 조용했고, 더워서 옷도 막 걷어 입었던 거 같아. 근데 이게 참 좋아요. 촬영할 때 그런 시간들이 마음에 남는다는 게. 그래서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거 같아요.”
―스무살 넘게 차이 나는 동료와 세대를 초월해 좋은 대화 상대가 된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요.
“제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철딱서니가 없어요. 우리 둘 다 할머니 손에 커서 그런지 서로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기도 하고. 태리씨는 중심이 잘 서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람을 대할 때 허투루 하는 말이 없고 의도적으로 뭘 더 하지 않더라고요. 둘 다 별로 강요를 안 해. ‘이거 꼭 하세요’ 하는 게 없어요. 탐구력이 있어서 배우는 거 좋아하고, 거기 가면 뭐가 좋더라 공유하고.(웃음) 나이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미진해요. 자주 미진하다고 느껴요. 나는 요만큼 변했는데 후배들은 더 변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래서 비판에 늘 열려 있으려고 해요.” 사진가 윤송이 제공
제 배역은 자기 아니면 아무도 못해
새 역할 맡을 때마다 용기·책임감 따라
자꾸 도전해보는 거죠, 실패할 수 있죠
그 순간에 충실하게 ‘오늘’ 살아갈 뿐
―동년배 여성 배우들과의 우정도 각별합니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함께 출연한 김혜수 배우와 인터뷰마다 서로 겨루듯이 칭찬을 주고받으시더라고요.
“나는 칭찬에 인색해요. 칭찬을 잘하지도 못하고, 받을 때도 겸연쩍고요. 근데 김혜수 배우는 나뿐만 아니라 좋은 스태프들 만나면 마음을 다해 칭찬해요. 어릴 때부터 일을 해온, 이제는 장인이 된 사람의 마음 상태란 저런 게 아닐까, 놀라워요.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말들로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누군가의 장점을 묘사하는 게 가능한지. ‘좋다’라는 뜻을 그렇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저는 몰랐던 거죠. 말이 곧 생각이잖아요. 그런 생각을 말로 옮길 수 있다는 게 멋있죠. 사랑스럽고. 제가 옆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영화 은 여성 감독, 여성 배우 주연의 작품이기도 했죠. 두루 좋은 평을 받았고요. 본인이 만드는 궤적이 뒤에 올 여성 배우들에게 영향을 줄 거라는 걸 의식하시나요?
“앞으로 역할을 맡아갈 새 세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고, 혼돈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래서 조언이 필요하고,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미진해요. 자주 미진하다고 느껴요. 나는 요만큼 변했는데 후배들은 더 변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래서 비판에 늘 열려 있으려고 해요. 나조차도 스스로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으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와 윗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반대로 아랫세대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점점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마다 큰 용기가 필요하고, 책임감도 따라요. 그렇지만 책임감을 짐 진 얼굴로만 살 수는 없으니까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요. 운 좋게 비중 있는 역할을 받을 때 ‘아니요. 저는 이만큼만 먹고 살겠습니다’ 할 수도 없으니 자꾸 도전해보는 거죠. 실패하더라도.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어떻게 떨치려 하나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제가 느끼는 윤회는 그런 거예요. 개미가 옮겨놓은 무언가가 꽃씨를 피우고, 그 씨앗이 농작물이 되고, 농작물이 돼 나에게 오는 과정이 윤회 같아요. 과정으로 인식되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도달해 있는 거고, 후회한들 바꿀 수 없잖아요. 저는 바꿀 수 없는 건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오늘을 살 수 있는 지혜라고 믿어요. 미래가 오늘에 의해 바뀔 거니까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저는 옛날 사진들을 잘 안 찾아봐요. 볼 필요가 없어. 나는 그때 내 모습을 잘 알고 있거든.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 오늘을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일상적 고뇌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웃음) 그걸 염두에 두며 살아서가 아닐까 해요.”
―일전에도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죠.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 건 좋아하지만 나만을 위한 기록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진 찍는 것도 그렇고요. 자료를 남기는 일도 포기했어요. 포스터 같은 거 백날 모아봤자 관에 가지고 갈 수도 없잖아. 등한시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갖고 있는 게 버거워요. 그건 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참여하는 그 순간에 충실하고 싶어요. 다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가슴에 손을 얹는다.) 여기에 이미 다 담겨 있잖아요.”
유선애. 패션 매거진 피처 디렉터. 1990년대에 태어난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묶은 인터뷰집 (2021, 한겨레출판)을 펴냈다. ‘캐릭터’라는 타인의 자리로 자신을 옮겨 그 사람이 볼 법한 눈으로 세계를 보고, 행동하고 말하며, 매 순간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배우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오랜 시간 한 사람을 깊이 탐구하고 탐험해온 중견 여성 배우들에게 ‘배우는 삶’에 대해 묻고, 듣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