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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 _06
1992년 1월22일 오전(현지시각) 김용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 겸 정치국 후보위원(사진 위쪽 얼굴이 보이는 이)이 뉴욕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과 사상 첫 북-미 고위급회담을 하려고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다. 미국은 ‘김정일의 남자’ 김용순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자료사진
한국과 미국이 ‘김용순 방미’를 북-미 관계 개선 등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기회로 활용했다면 동북아의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터. 하지만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진 동북아의 패권 유지에 ‘새로운 가상적’이 필요했던 부시 행정부와, ‘북-미 직거래’를 두려워한 노태우 정부는 “역사의 외투”를 움켜쥐려 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께 비밀 사항을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군 주둔 문제입니다만, 1992년 초 미국 공화당 정부 시기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북과 남이 싸움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댔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전략적 가치를 탐내어 수많은 침략을 자행한 사례를 들면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로 보아 반도의 평화를 유지하자면 미군이 와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해줬어요. 제가 알기로 김 대통령께서는 ‘통일이 돼도 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제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는 것이 남조선 정부로서는 여러 가지로 부담이 많겠으나 결국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미군 철수”를 입에 달고 살아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도대체 누가 이렇게 놀랍고도 흥미로운 주장을 했을까? 김일성 주석과 함께 “영원한 수령”으로 불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2000년 6월13일 오후 3~7시 평양 백화원영빈관 회의실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한 말이다. 이를 김 대통령과 함께 직접 들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증언자다.(, 92~93쪽) 김 위원장이 ‘(북에 적대적이지 않은) 한반도 평화유지군으로서 미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강렬한 북-미 관계 정상화 의지를 돌려 말한 데에는, 이 발언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한테 전해달라는 외교적 포석이 깔려 있다.
돌이켜 보건대 “김정일의 남자”로 불리던 김용순 조선노동당 국제비서의 1992년 1월 “특사 방미”는 이후 30년째 동북아시아 평화의 숨통을 조여온 이른바 ‘핵 갈등’을 회피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신의 은총으로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선언(1992년 1월28일 의회 연설)처럼 “역사의 종언”과 “유일 초강대국의 희망찬 미래”에 들뜬 미국은 ‘넝쿨째 굴러든 호박’을 발로 걷어찼다.
1992년 1월22일 뉴욕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이뤄진 김용순 비서와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만남은 1948년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 이래 사상 첫 북-미 고위급회담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승냥이”라 비난하면서도 미국한테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 사투해온 북으로선 ‘다른 미래’를 열어갈 전례 없는 기회라 여겼을 법하다. ‘평화유지군으로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 용인(요청)’은 북의 김일성·김정일 최고수뇌부가 김용순 특사 손에 들려 보낸 ‘미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갈망을 담은 ‘선물’이었다. 거기엔 1334㎞에 이르는 국경을 맞댄 중국의 압도적 영향력을 미국을 끌어들여 제어하려는 북한판 ‘이이제이’ 전략이 깔려 있다. 이는 ‘반미·친중’을 북의 불변의 대외정책 기조라 여겨온 세간의 인식이 북쪽 최고 수뇌부의 속내를 오독한 것일 수 있음을 방증한다. 사람들의 삶처럼, 국가의 삶도 생각보다 복잡하다.
하지만 “냉전 승리”에 취한 미국은 북이 ‘친미 하고 싶다’며 내민 손을 맞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캔터는 “‘(관계)정상화’라는 표현은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협상하지 말 것” 따위 지침에서 1㎜도 벗어나서는 안 될 처지였다. 캔터는 태평양을 건너온 김용순한테 “핵사찰을 받든가, 아니면 더 심한 고립과 경제적 붕괴의 길을 걷든가 양자택일의 선택지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고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회고록에 적었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어떤 보상을 기대할 수 있냐고 김용순이 묻는다면? “아주 모호한 태도를 취하라”는 지침 탓에 캔터는 ‘특정하지 않은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얄궂은 말로 일관해야 했다.
이럴 거면 부시 행정부는 김용순을 왜 뉴욕으로 초청했을까? 1991년 11월 서울 아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각료회의 직후 베이징을 찾은 베이커한테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한 ‘부탁’이 밑돌이 됐다. 베이커는 딕 체니 국방장관한테 보낸 비밀전문(1991년 11월18일)에 이렇게 적었다. “중국은 북한의 고립화 공포와 안보 불안을 완화하려면 교차승인이 필요하며, 그를 통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미국이 북한과 고위급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북한과 접촉의 격을 높이겠지만, 그 접촉에서 평화 문제를 협상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핵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방침과 기대 사항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으로 주제를 한정하겠다고 답했다.” 한국과 수교(1992년 8월24일)를 앞둔 중국이, 핵사찰을 성사시키려면 북의 “고립 공포와 안보 불안”을 눅일 북-미 고위급회담이 필요하다고 미국을 설득했다는 얘기다.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1988년 ‘7·7특별선언’)고 공언한 노태우 대통령은 정작 부시 행정부가 북과 고위급회담을 하려 하자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92년 1월6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가 “미-북 접촉은 미의 입장을 북에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북과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고위급회담 방침을 사실상 통보하자, 노 대통령은 “한번만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벗겨나가” 북을 고립시키겠다는 ‘공격’ 의지와 미국이 한국이 없는 자리에서 북과 비밀거래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엉킨 반응이다. 그때 노 대통령이 ‘7·7선언’의 공언처럼 북-미 관계 개선의 ‘촉진자’로 나섰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용순이 뉴욕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는데도 북의 공식 반응은 “만족스럽다”였다. 노동당 중앙위 기관지 은 1992년 1월24일치 3·6면 기사로 “회담은 솔직하고 건설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족스럽게 진행됐다”며 “이미 시작된 조미접촉을 조미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문제를 풀 대화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도했다. ‘접촉’했으니 이제 ‘협상’하자는 얘기다. 김일성 주석은 1992년 3월31일 편집국장과 한 인터뷰에서 ‘김용순-캔터 만남’이 “조미관계를 개선하는 데서 일정한 의의”를 지니며 “우리는 앞으로 조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307쪽)
김용순은 캔터와 다시 만나려 무던히 애를 썼다. 김용순은 베이징 북-미 참사관급 접촉 창구로 캔터한테 보낸 편지(또는 구두메시지)로 핵사찰 등과 관련한 북의 방침과 ‘실천’을 알리며 고위급 접촉 재개를 숱하게 요청했다. 캔터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김용순은 1992년 11월에는 허종 주유엔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를 통해 ‘김용순-캔터 회담 재개’를 요청했으나 캔터는 거부했다. ‘1차 북핵위기’가 비등점으로 치닫던 1993년 2월3일 김용순은 국제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워싱턴을 방문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으나, 미 행정부는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냉담’의 결과는 혹독했다. 1993년 3월12일 북은 “핵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을 탈퇴한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을 발표해 “갈등과 대항을 통한 대미 접근 전략”을 가속화했다. ‘북-미 제네바기본합의’(1994년 10월21일)로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2021년 6월 한반도는 여섯 차례 핵시험을 한 ‘핵무장 북한’과 2500만 북녘 인민의 민생경제까지 표적으로 삼은 미국·유엔의 고강도 제재의 틈바구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다.
그럼에도 전적으로 헛된 역사는 없다. 김용순의 “특사 방미”는 북-미 관계정상화의 디딤돌이 될 북-미 고위급대화의 ‘역사적 원형’이 됐다. 2000년 10월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특사 방미”와 2019년 1월 김영철 당중앙위 부위원장 “특사 방미”의 선례이자 밑돌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김용순 방미’를 북-미 관계 개선 등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기회로 활용했다면 동북아의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터. 하지만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진 동북아의 패권 유지에 ‘새로운 가상적’이 필요했던 부시 행정부와, ‘북-미 직거래’를 두려워한 노태우 정부는 “역사의 외투”를 움켜쥐려 하지 않았다. 통일독일의 문을 연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강조한 “역사의 외투가 스쳐 지나가면 정치가들은 그 소맷자락이라도 움켜잡아야 한다”는 비스마르크의 경구가 떠오르는 나날이다.
이제훈ㅣ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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