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목차
결혼 직후의 나혜석(1920)
구미여행 중의 나혜석과 남편(1927)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였다.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발표했다. 1918년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고 1921년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유학시절 약혼자였던 시인 최승구가 죽은 후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하여 만주 안동(지금의 단동)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조선 여성 전체의 진보라고 하는 점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신여성의 대표 인물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 계속 입선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의식적인 여성적 글쓰기를 펼친 작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라고 규정한 "어머니 된 감상기"(1922)는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것으로 사회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림 기법만을 배운 유화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난 구미 여행 길에 파리에서 만났던 최린과의 관계가 귀국 후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면서 1930년 이혼을 한 나혜석은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을 발표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 자신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조라는 것은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주체의 자유 의지에 속하는 ‘취미’의 문제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림이 불타고 병이 나고,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은 심신이 병들어 갔다.
일제 말기 수덕사에도 있고, 양로원에도 있었으나 매어 있기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길 위에 서는 것을 좋아했던 나혜석은 해방 후의 어느 겨울날 행려 병자로 죽어갔다.
1914년 무렵 남성모델을 그리는 사립여자 미술학교 서양화과 수업풍경
저것이 무엇인고 (신여자, 1920년 4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신여자, 1920년 6월)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