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언론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내가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은 계훈모 선생이다."
한국 언론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정진석 교수가 쓴 글이다. 언론사 연구자 정진석은 어떤 도움을 받았길래, 이런 '감사의 글'을 남겼을까?
정진석 교수는 의 첫 번째 인물로 계훈모를 다뤘다. 이 책에서 정진석은 계훈모(桂勳模)를 "를 위해 태어난 애국자"라고 표현했다. 정진석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준 계훈모는 누구일까? 그는 도서관 '사서'다.
계훈모와 그의 아버지 계연집
▲ 계훈모의 아버지, 봉곡 계연집 1931년 계연집은 소파 방정환의 임종을 지켰다. 소파는 세상을 떠날 때, 계연집이 대신 부담했던 ‘명월관 외상 술값’을 걱정하는 말을 남겼다. 소파가 세상을 떠난 후 계연집은 월급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소파의 외상 술값을 10년 넘게 대신 갚았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했다. 소파 집안과 교분은 계속 이어져, 계훈모와 소파의 아들 방운용도 친했다.
ⓒ 계한경
계훈모는 1918년 8월 23일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부황동 322번지에서 태어났다. 계훈모의 아버지 봉곡(鳳谷) 계연집(桂演集)은 천도교 경성종리원장, 천도교 중앙총부 교무원장을 거쳐, 서울교구장을 맡았다.
계연집은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평안북도 선천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1923년 계연집은 천도교청년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천도교청년당은 1931년 천도교청우당으로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세계 최초로 어린이 운동을 벌인 소파 방정환은 1931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계연집은 소파 방정환의 임종을 지킨 사람 중 한 명이다.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사위다. 계연집이 방정환의 절친인 동시에, 천도교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인 1948년 천도교청우당은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 협상에 적극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청우당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1948년 8월 11일 수도경찰청에서 좌익 인사를 검거할 때, 계연집은 검거되기도 했다.
1954년 천도교 23대 서울교구장이 된 계연집은, 1968년까지 서울교구를 이끌었다. 계훈모의 집안이 천도교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었는지 알 수 있다.
불혹에 이직한 도서관
▲ 한국도서관학교 수료증 1961년 계훈모는 연세대 도서관학교에서 사서의 고급 훈련 과정(특수 과정)을 수료했다. 이 수료증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모두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당시 연세대 총장 윤인구는 부산대 초대 총장 시절, 건축가 김중업을 초빙해 효원도서관(지금의 박물관)을 건립했다. 한국도서관학교장 민영규는 연세대 도서관장과 한국도서관협회장을 지냈다. 크로슬린은 연세대 도서관학과 초기 외국인 교수 중 한 명이다.
ⓒ 계한경
재동보통학교와 보성중학교를 다닌 계훈모는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부친 계연집도 보성중학교를 6회로 졸업했다.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촉발한 이기붕 부통령도 보성 6회 졸업생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과 함께, '국립도서관' 이름을 지은 최승만도 보성 6회 졸업생이다. 1945년 당시 최승만은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과장이었다.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계훈모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대학 제3상업학교를 거쳐, 1943년 9월 일본전수대학 전문부 경제과 3년 과정을 졸업했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계훈모는 자신의 일본 유학 시절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엉터리 학교를 엉터리로 다녔을 뿐."
조선으로 돌아온 계훈모는 1943년 11월부터 경성부와 동신직물에서 12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그는 문용자와 결혼했다. 계훈모는 천도교 교령 이종린의 주례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5년 9월 8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직한 계훈모는, 1973년 8월 23일 55세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18년 동안 근무했다. 계훈모가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어떤 계기로 도서관에 몸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의 도서관 이직으로, 훗날 한국 언론 분야는 최고의 '사서'와 '연구자'를 얻는다.
계훈모는 1968년 7월부터 16개월 동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도서관에서 일했고, 나머지 기간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그는 '수서' 업무를 담당했다. 서기(書記)로 근무하다가, 1959년 11월 18일부터는 사서(司書)로 일했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부터 관악 캠퍼스 시대를 맞았다. 그는 관악 캠퍼스를 경험하지 못하고, 동숭동 시절 서울대 도서관에서 일했다. 계훈모가 일한 도서관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지은 바로 그 건물이다. 가회동에 살았던 그는 동숭동 서울대 도서관까지 늘 걸어 다녔다. 점심 끼니도 자주 걸렀다. 박봉이었던 탓에 차비와 식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계훈모는 서울대 도서관으로 이직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근무하거나 도서관학 공부를 하진 않았다. 서울대 도서관에 근무하던 1961년, 그는 연세대학교 부설 한국도서관학교 특수과정(1년 과정)을 이수했다.
사서 계훈모, 연구자 계훈모
ⓒ 계한경
구본희 기자는 계훈모의 서울대 도서관 시절을 이렇게 썼다.
"사실 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편이어서 동료들과 활달하게 어울려 술 한 잔 나누는 일도 별로 즐기지 못했다. 또 말단 공무원의 박봉으로는 특별히 사치한 취미나 오락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저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새로 들어온 책을 서가에 챙겨 꽂거나 옛날 책들의 먼지를 털고 정리하는데 남달리 성실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서가 한구석에 팽개쳐진 낡은 신문이나 잡지.서류들을 만지고 정리하는 일을 천직이요,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35년 동안 근무한 박종근은, 수서 업무를 담당했던 계훈모에 대해 회고를 남긴 바 있다.
"수서업무를 담당하셨을 때에는 그 복잡한 잡지 및 신문의 체킹 카드 서식을 직접 구상하여 처음으로 만들어 최근까지 사용했는데, 당시 선생의 창의적인 업무 태도와 성실한 근무 자세는 많은 동료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서울대 퇴임 후 계훈모는 1994년까지 천도교 자료실과 관훈클럽에 나가 편찬에 힘썼다. 우이동 천도교 자료실(지금의 천도교 중앙도서관) 시절에는 홀로 '원 맨 라이브러리'(one man library)에서 일했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래 일한 계훈모는, '언론사 연구자'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실제로 도서관보다 언론학 분야에서 계훈모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큰 평가를 받았다. 그가 펴낸 저작 자체가 대단하다. 언론 분야에서 계훈모가 펴낸 저작을 살펴보자.
( 통권 제67호 별책부록), (국회도서관, 1970), 제1권 1881-1945(1979), 제2권 1945-1950(1987), 제3권 1951-1955(1993).
일개 사서 혼자 이룬 업적
▲ 계훈모는 1978년 집필을 시작해, 1993년 총 3권으로 발간을 끝냈다. 그는 방대한 기초 자료를 샅샅이 조사해서, 언론에 관련된 사건.사항부터 언론인의 인사이동과 동정, 언론 제작의 변화까지 날짜순으로 배열하고 그 출전을 상세히 밝혔다. 흩어져 있던 자료를 집대성한 는 언론 역사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사항을 망라하고 있다.
ⓒ 백창민
특히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는, 계훈모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탄생했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작고 낡은 연립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계훈모는, 프레스센터 14층 관훈클럽 사무실 한구석에서 자료 더미에 파묻혀 를 완성했다.
구본희 기자(월간 기자로, 1986년 3월호 '발전 속의 후진병을 극복해 가는 사람들 - '한국언론연표'를 만드는 계훈모씨'라는 특집 기사를 냈다)는 계훈모의 작업을 이렇게 평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는 그 방면의 여러 학자들이 몇 해 동안 고생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신문이나 언론을 전공한 사람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어렵고 큰 작업을 학계와는 상관도 없고 더욱이 언론에 종사해 본 바도 없는 일개 사서 혼자의 힘으로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낸 것이다."
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언론사의 관점에서 '연표' 형식으로 정리한 자료다. 계훈모는 1881년부터 1955년까지 신문 잡지의 발행과 여러 사건을 세 권으로 정리했다. 1881년은 부산에서 가 발행된 해로, 이 땅에 신문의 존재가 알려진 해다.
1978년에 시작한 발간 사업은 15년만인 1993년에 끝났다. 는 1권 1294페이지, 2권 1313페이지, 3권 1342페이지다. 1권은 신문을, 2권은 잡지.출판을, 3권은 방송.연극.영화와 언론 관련 법령.자료를 꼼꼼히 다뤘다. 각 권의 분량은 1300페이지를 넘나든다. 계훈모는 언론매체의 창간날짜부터 간행 횟수, 크기, 형태, 구독 액수까지 자세히 정리했다. 그가 정리한 항목이다.
"1896. 4. 7. 독닙신문. 12호부터 독립신문, 이후 독립으로 약칭. 주간 서재필(필립 졔손). 한성 정동. 주 3회 간. 순국문. 평판 중형. 4면 3단. 35×23cm. 4면. 영문 이름 .(종지부 있음) 3백 부 인쇄. 1년 1원 30전. 한 달 12전. 한 장에 동전 한 푼."
영문판 제호는 "THE INDEPENDENT."다. 계훈모는 제호 뒤에 '마침표'(종지부)가 있다는 부분까지 기술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하게 를 정리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 언론사 분야의 노작
▲ 계훈모와 정진석 한국 언론사 연구의 두 거장인 계훈모와 정진석은, 1971년 동숭동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 계훈모는 정진석의 언론사 연구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서다. 사서와 연구자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백아와 종자기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지음"(知音) 관계였다. 사진 왼쪽이 계훈모, 오른쪽이 정진석이다.
ⓒ 소명출판
1973년 서울대 도서관을 퇴직한 계훈모가, 이후 삶을 송두리째 바쳐 펴낸 '노작'이 바로 다. 계훈모는 발간에 대한 공로로, 1973년 12월 13일 양서출판문화상 장려상을, 1994년 1월 11일에는 관훈클럽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필생의 저작이 된 집필 작업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계훈모를 인터뷰한 구본희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혼자서 해냈다."
정작 계훈모 자신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해보았자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니까 나한테 왔다"라고 말했다. 계훈모가 언론, 특히 신문에 주목하고 집착한 이유는 뭘까? '신문만큼 훌륭한 역사 기록은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 허영섭은 이런 계훈모를 '언론 역사의 창고지기'라고 표현했다.